/사진 = 조수아 디자인기자
비밀이 새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반도체·디스플레이·배터리 등 국내 첨단 산업을 휩쓸고 있는 중국향(向) 기술유출에도 신고를 꺼리는 기업이 늘고 있다. 최근 6년간 수십조원이 넘는 피해가 발생했지만 알려진 유출사례는 여전히 적다. 기업들은 주가 하락과 추가 유출 피해, 신고 후 불이익을 우려해 섣불리 공개하기를 꺼린다.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영업 비밀을 지키겠다는 기업도 나온다.
23일 머니투데이가 국내 주요 기업 8곳에 기술 유출 시 사후대처를 질의한 결과 이 중 6곳이 '외부에 알리지 않겠다'고 응답했다. 그 이유로 '수사 과정의 2차 유출'과 '주가 하락', '대외 이미지 훼손' 등을 꼽았다. 특히 2차 유출은 기업의 최대 걱정사항 중 하나다. 수사 인력이 비밀이 가득한 팹(생산 설비) 안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부담이다. 수도권의 한 반도체 기업 관계자는 "신고하려면 유출된 기술·인력을 상세히 보고해야 하는데, 이것도 다른 형태의 기술 유출"이라고 말했다.
신고를 하더라도 '기술 유출이 발생한 기업'으로 낙인이 찍힌다. 유출 사실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면 뒤늦게 이를 인지한 행정 기관이 기업에 질책을 가하는 사례도 많아 기업의 불만이 크다. 한 기업 관계자는 "피해를 본 기업을 위해 유관부서가 나서 다퉈 주지 않고, 정부가 추진하는 신규 프로젝트에 교묘하게 배제하는 방식으로 벌을 주는 경우가 많다"고 하소연했다.
이 때문에 국내 업계는 유출 방지책을 다시 손질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기술을 빼가는 방식이 점차 진화하면서 2차, 3차 피해를 막기 위해서 재발 방지가 필수적이지만, 기업과 협조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다. 미국은 기술 유출을 간첩죄로 규정하고 1급 기밀로 다루며, 민사사건도 연방 법원에 제소할 수 있게 '투트랙 처벌' 제도를 채택했다. 일본은 유출 조사 과정을 비공개로 진행한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술 유출 수사에서는 기업의 비밀이 새나가지 않도록 최대한 보호해 줘야 한다"며 "기업들은 외부에 피해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전문 수사팀을 꾸리든지, 기업과 긴밀히 공조하는 등 2차 피해를 막는 데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