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소년시대'. /사진=쿠팡플레이
이 드라마는 1980년대 말 충남 부여에서 일상을 맞고 사는 주인공 병태(임시완)가 일진들에게 복수하는 내용을 그렸다. 토종 OTT 드라마 중 가장 많은 화제를 뿌리고 있다.
드라마 '소년시대'. /사진=쿠팡플레이
드라마는 모든 학폭 장면을 심각하거나 진지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B급 코믹물을 전제로, 아무리 어둡고 두려운 상황이라도 '깊은 절망이나 좌절'의 끝으로 달리지 않는다. '더 글로리'가 시작부터 끝까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시퍼런 긴장감으로 봐야 했다면, 이 작품은 위기의 순간에 번뜩이는 재치로 웃음을 던지고 힘들어하려는 시청자들을 되레 위로한다. 때리고 맞고 싸우는 장면은 많지만 피해자들의 상처를 대놓고 드러내며 "같이 아파하자"고 부추기지 않는다.
학폭으로 얼룩진 감동적인 장면과 시사점은 병실에서 친구에게 무릎 꿇고 빌 때, 어머니가 착한 아들에게 용서를 구할 때처럼 결정적 한방으로 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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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소년시대'. /사진=쿠팡플레이
충청도 사투리는 경상도와 전라도 사투리에 비해 '맛'이 떨어지는 편이다. 억양으로 승부하는 경상도 사투리나 말맛이 살아있는 전라도 사투리보다 밋밋하다는 평가가 많았는데, 이번 작품으로 충청도 사투리의 진가가 드러났다. 억양이나 표현보다 그 말이 지닌 해학과 재치에 대한 평가가 그것. 무엇보다 말 그 자체보다 그 말 너머의 특유의 넉살이 각박한 세상에서 한 줌의 긍정적 에너지로 해석되기도 한다.
맞는 게 일상인 장병태는 학폭의 현실을 이렇게 관조한다. "아이고, 사는 게 그냥 숨 쉬고 밥 먹고 잠자고 그게 다인디, 그게 왜 이라고 힘드냐."
이 사투리의 진가는 물건 흥정할 때 흔히 듣던 패턴에서 나온다. 부여에선 버리는 깻잎이 공주에선 팔린다는 사실을 캐치한 학생들이 시장 상인과 흥정할 때 가격이 안 맞자, 3단 논법으로 에둘러 협상하는 식이다. "아니여. 가서 소나 멕이쥬."(1단계) "그냥 염소 이불이나 만들어야겄다. 쌈 싸 처먹어야겄다."(2단계) "이번에 또 키우면 공주읍사무소에서 목을 맬겨."(3단계)
경상도의 "마, 쫌", 전라도의 "거시기~" 처럼 충청도의 대표적 표현은 "이"다. 굳이 해석하면 "안 그러냐?"로 물을 수도 있고, "그려"하고 대답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당장 회사나 모임에서 오락거리용으로 써먹을 만큼 재미나고 시원하다.
이 드라마가 학폭인데도 아주 우울하거나 슬프지 않는 가장 큰 배경도 충청도 사투리의 독특한 말투 덕분이다. 톤이 가파르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하는 데다, 말 끝을 길게 늘어뜨리는 긴 호흡, 종결 어미로 많이 사용되는 '~여'가 주는 존대의 느낌이 모두 모여 말 자체가 갖는 유순함이 폭력 행위 자체가 주는 두려움을 상쇄하는 효과를 안긴다.
장병태의 아버지로 나온 서현철은 이 드라마 이전부터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핵 인기를 끌었다. 개그맨 김두영이 유튜브를 통해 선보인 충청도 사투리 시리즈는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재치의 달인으로 그려진다. 충청도 사투리가 앞으로 사투리의 1순위로 등극할 날도 얼마남지 않은 듯하다.
드라마 '소년시대'. /사진=쿠팡플레이
개별 장면, 미시적 주제를 따라가면 어디서 한 번쯤 본 기시감 넘치는 작품들로 연결되기 십상이다.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본류를 두고 있는 듯한 학교생활의 서열과 우상, 폭력 문제들이 그렇다. 실제로 이 소설의 주인공 한병태(피해자)를 비슷하게 따라 한 '소년시대' 주인공 이름도 공교롭게 장병태다.
폭력을 통해 영웅이 되기 싫었지만, 그 폭력으로 결국 영웅의 삶을 즐기는 과정 역시 소설의 줄기를 따랐다. '말죽거리 잔혹사' '싸움의 기술' '약한 영웅' 등 익숙한 학교 폭력물이 보여주는 코드들, 이를테면 복수의 과정, 승리 비법, 친구들과의 공동 전선 등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시감의 흔적은 10회 챕터 모두 어디서 본 듯한 제목들이라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1회 '와호장룡', 2회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3화 '왠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등 기존 유명 영화나 드라마에서 차용한 제목이다.
주제곡 2개는 더 친밀하다. 모어(more)의 '깊은 밤에 우리', 무난(Munan)의 'When I was young'은 국내 뮤지션들의 창작곡인데 80년대 아날로그 팝의 정서를 그대로 흡수했다. 지금의 잔나비 음악이나 길버트 오 설리반의 'Alone again (naturally)'(1972) 선율이 절로 떠오른다. 재미있는 건 극 중 라디오 DJ가 버스 안에서 "오늘의 마지막 곡은 더앤트 앤 더그라스호퍼(개미와 베짱이)의 'When I was young'"이라고 소개하는데, 개미와 베짱이라는 그룹은 인위적으로 설정된 그룹일 뿐이다.
하지만 기시감 넘치고 친숙한 재료들을 모두 한데 모아 비빔밥처럼 섞으면 완전 다른 작품으로 재탄생한다. 익숙하지만 처음 보는 듯한 신선한 느낌이 매회 뇌와 심장을 자극한다.
드라마 '소년시대'. /사진=쿠팡플레이
무엇보다 이 드라마는 기존 성공 공식과 거리가 먼 무기로 시청 순위를 갈아치우고 '마니아'층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미 유명한 웹툰이나 소설에서 따오지 않고 오로지 김재환 작가의 창작품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주연과 조연의 구분이 비교적 확실한 인기 작품들과도 결을 달리한다. 지질이인 주인공은 연약하고 착하기만 한 '피해자'로 그려질 뿐이지만, 조연들의 '집단 육(肉)성'이 곁들여지면서 그 시너지 효과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커진다.
흔히 학폭물은 영웅이 존재하든가, 오랫동안 준비해온 치밀한 계획이 성사되는 식으로 전개되기 마련인데, '소년시대'는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짜낸 전략으로 승부한다는 점에서 재미있고 독특하다. 지금껏 나온 학폭물과는 분명히 다른 지점이기도 하다.
여기에 이명우 감독이 그간 연출해온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준 '스토리텔링'의 힘이 고스란이 이 작품에 스며있다. 드라마 '올인' '발리에서 생긴 일'(이상 조연출)을 시작으로 '펀치', '귓속말' 같은 흥미진진한 작품들의 연출을 통해 보여준 스토리를 끌고 가는 힘이 이번 코믹물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된 셈이다.
드라마 '소년시대'. /사진=쿠팡플레이
코믹물이라고 쉽게 볼 대사들이 아니다. 군데군데 가슴에 새길 명대사들이 적지 않다. 힘 있는 자, 누리는 자, 가진 자들이 특히 눈여겨볼 대사일지도 모른다.
'아산 백호' 정경태가 기억을 찾은 뒤 다시 힘으로 짓밟으며 내세우는 '조직의 안정'은 이렇게 정의된다. "이 세상 어디 가든지 말이여. 서열이라는 것이 있어. 사람이라고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니께. 근디 이 서열이 흔들리면 혼란이 생기고 폭력이 난무허는 법이여."
그간 가짜 '아산 백호'로 살았던 장병태는 부지불식간 이 정의를 체화하며 다른 이에게 똑같이 써먹는다. 서열이라는 건 이 세상의 참된 법칙이고 이 법칙이 깨지는 순간 폭력은 발생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것이 잘못된 믿음이고 깨져야 하는 악의 명제라는 사실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굳건히 믿고 지켜온 사람들의 존재 때문이다. 그 출발은 흑거미다. 흑거미는 '아산 백호'를 찾아 쉽지만 깊고 강한 메시지를 날리며 본때를 보여준다.
"너처럼 발 쓰고 주먹질 쓰면 폼이라는 게 있는디, 그 폼이 사람을 멋지게 만들거든. 니는 그게 없어. 양아치 새끼여. 이 바닥은 양아치는 살아남기 어려운 법이니께. 힘이 있는 자가 존경을 받지 못 하면 댐비는 놈들이 많아지는 법이다 이 말이여."
세상에 서열은 알게 모르게 존재할지 모른다. 하지만 정말 힘이 아닌 폼으로 서열에 맞게 행동하는 사람은 몇이나 되는지 드라마는 아주 간결하면서 예리하게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