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시평]무죄추정의 원칙

머니투데이 김태형 법무법인 지평 변호사 2023.10.24 0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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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사법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무엇일까? 중요한 가치가 많지만 '무죄추정의 원칙'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헌법과 형사소송법도 '피고인은 유죄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고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수사와 재판에서 피의자, 피고인이 유죄추정으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두고 있다.

모든 '원칙'이 그러하듯, 실제는 안타깝게도 무죄추정에 반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정치인, 연예인과 같은 공인들이 언론에 보도되는 혐의사실로 유죄가 확정되기 전에 이미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히거나, 일반인도 수사와 재판에서 무죄추정에 따른 권리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흉악범죄와 같이 이미 범행이 충분히 확인되었거나 범죄자가 적법하게 자백한 경우에도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보호해 주어야 하는지에 관하여는 논란의 여지도 있겠지만, 적어도 피의자나 피고인이 억울함을 호소하고 수사나 재판을 통해 혐의사실에 관한 충분한 검토가 필요한 사건에서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엄격히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형사사건을 맡은 변호사로서 어려운 상황 중에 하나는, 사기죄와 같이 고의가 문제되는 사건에서 피의자나 피고인은 무죄를 주장하나 수사기관이나 법원이 강하게 유죄 심증을 갖고 있을 때이다. 변호인 역할에 충실하려면 의뢰인의 뜻을 충분히 반영해 무죄를 주장해야 하는데, 자칫 '범행을 부인하면서 반성하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하여 불이익을 받게 되지 않을까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인신구속이 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러한데,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여 의뢰인을 도와야 하는 것인지, 최소한 인신구속은 피할 수 있도록 자백을 하고 법원에 선처를 호소해야 할지,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한다.

실제 형사재판을 하다보면, 판사가 유죄 심증으로 재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경우도 있다. 판사의 성향이나 사건의 성격이 영향을 줄 수도 있겠지만, 유죄판결문과 무죄판결문의 차이도 일정 부분은 영향을 미칠 것 같다.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유죄판결은 '판결이유에 범죄될 사실, 증거의 요지와 법령의 적용을 명시하여야 한다(제323조)'고, 무죄판결은 '피고사건이 범죄로 되지 아니하거나 범죄사실의 증명이 없는 때에는 판결로써 무죄를 선고하여야 한다(제325조)'고 규정하고 있는데, 실제로 무죄판결문은 왜 무죄인지가 비교적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는 반면, 유죄판결문은 공소장에 이미 어느 정도 정리되어 있는 '범죄사실'에 증거와 법령이 기재되어 있을 뿐이다. 시험에 비유하자면 유죄판결은 단답형이고 무죄판결은 서술형인데, 당연히 판결문 작성의 관점에서만 보면 유죄판결문을 상대적으로 더 쉽게 작성할 수 있다. 물론 최종 판단까지 판사들이 고심을 했을 것이므로 판결문만으로 난이도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르더라도 형사소송법 규정이나 판결문 작성의 실무는 문제의 소지도 있다. 단순히 '증거의 요지'만이 아니라 왜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기재하게 하고, '법령의 적용'에서는 재판을 통해 인정된 사실이 왜 구성요건에 충족되는지를 기술하게 한다면, 무죄를 두고 치열한 공방이 진행되는 사건에서는 법원이 보다 신중하게 사건을 검토하게 되지는 않을까?

물론 현실적으로 모든 형사판결문을 이처럼 작성한다면 부담이 클 것이고, 증거가 명백한 자백 사건까지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적어도 증거가 불분명하거나, 법적용에 논쟁의 여지가 있는 사건에서 피고인도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면, 유죄를 판결할 경우 그 판단에 이르게 된 경위를 보다 충실하게 '서술형'으로 기재하게 하는 것은 어떨까? 그렇다면 판결을 받은 피고인도 더욱 납득할 수 있을 것이고, 판사도 왜 유죄인지를 보다 심도있게 고민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무죄추정의 원칙도 보다 충실하게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김태형 법무법인 지평 변호사김태형 법무법인 지평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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