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가 온 세계를 매수하는 방법[PADO]

머니투데이 김수빈 에디팅 디렉터 2023.10.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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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과거에는 끝물인 선수들이나 가는 곳으로 여겨졌던 사우디 프로 축구 리그에 요즘에는 네이마르 같은 여전한 스타플레이어부터 유망주까지 합류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작년에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케이팝 콘서트가 수도 리야드에서 열렸죠. 사우디가 엄청난 속도로 소프트파워를 끌어모으고 있는 겁니다. 20년 가까이 지속됐던 저금리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사우디 '오일 머니'의 위력은 더욱 막강해졌고, 이제 사우디가 전 세계를 상대로 그 돈을 굴리고 있습니다. 사우디의 부상은 서구 정치 지도자들이 그렇게 부정하고자 했던 '민주주의 없는 자본주의'가 번영할 수도 있음을 시사하며, 이미 현실로 다가온 기후변화 시대의 주도권을 잡고자 벌어질 치열한 쟁투의 서곡입니다. 여기 소개하는 영국 주간지 뉴스테이츠먼 기사가 말미에서 읊조리듯 "석유도 알라도 없는" 한국은 사우디를 주시해야만 할 것입니다. 기사 전문은 PADO 웹사이트(pado.kr)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제다 로이터=뉴스1) 장성희 기자 = 지난 6월7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서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가 안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과의 회담 자리에 앉아있다. /그래픽=PADO(제다 로이터=뉴스1) 장성희 기자 = 지난 6월7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서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가 안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과의 회담 자리에 앉아있다. /그래픽=PADO


2018년 개봉한 블록버스터 영화 '블랙 팬서'는 와칸다라는 아프리카의 초현대적 문명을 배경으로 한다. 와칸다는 험준한 지형과 첨단기술로 구현된 차폐막으로 현대 세계와 유리된 곳이다. 와칸다의 국력과 안보는 세계에서 가장 단단하면서도 가벼운 금속 비브라늄에서 나온다.

와칸다는 기초 과학연구에 많은 투자를 해 자체적인 무기 체계, 항공기, 의료 기술을 개발했다. 영화에서 와칸다인들은 이 경이로운 기술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이용해야 하느냐로 갈등을 겪는다. 엄청난 투쟁 끝에 영화는 와칸다가 후원하는 봉사활동 센터가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빈민가에 열리면서 끝난다. 와칸다는 박애를 선택한 것이다.



2018년 봄, 사우디아라비아에 35년 만에 처음으로 영화관이 생겼을 때 상영한 영화가 바로 블랙 팬서였다. "인종과 식민주의 문제를 다루면서 슈퍼히어로가 여성 전사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왕국을 위해 싸우는 걸 보니 정말 멋져요." 한 여성 관객이 말했다.

젠더에 대한 언급은 우연이 아니다. 사우디에서 여성에게 제한적으로나마 투표권이 주어진 것이 불과 3년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여성이 운전도 할 수 있게 됐다. 2023년에는 법적으로는 여성의 지위가 여전히 종속적임에도 불구하고 사우디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가 우주를 방문했다.



지난 몇 년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있었던 거의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블랙 팬서 상영은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무함마드 빈 살만(MBS)이 기획한 사업이었다. 2017년 왕세자 자리에 오른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공공 서비스를 발전시키고 석유 의존에서 벗어나 경제를 다각화하기 위한 장기 계획인 '비전 2030'을 발표하며 사우디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인이 됐다.

왕국의 실질적 통치자로 취임한 첫해에 그는 왕실 핵심 인물을 포함한 고액 자산가들을 부패 혐의로 리야드 리츠칼튼 호텔에 구금했다. MBS가 자기 자신을 블랙 팬서의 주인공 트찰라처럼 핸들을 꽉 붙잡고 나라를 이끄는 인물이라 여겼으리라 추측하더라도 과언은 아니다.

미학적으로 빈살만 왕세자는 사우디를 와칸다처럼 만들려 하는 듯 보인다. MBS가 권좌에 앉은 이후, 사우디 벤처기업의 보도자료를 토대로 기사를 쓰면 무슨 SF소설을 쓰는 듯한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SF 팬을 자처하는 MBS는 새로운 국가 프로젝트를 설계를 위해 SF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문화학자 크리스 헤이블스 그레이는 '솔라펑크'와 '포스트 사이버펑크'를 필두로 다양한 미학적 유형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사우디의 규모는 SF소설보다 더 크다. 래리 니븐과 제리 포넬의 디스토피아 SF소설 '충성의 맹세'(1981)에는 로스앤젤레스의 스카이라인을 능가하는 토도스산토스 또는 더 박스(The Box)라고 불리는 입방체 모양의 도시가 등장한다.

2023년 사우디아라비아는 그보다 두 배 더 큰 도시 계획을 발표했다. '뉴 무라바'(New Murabba)는 더 샤드보다 모든 면이 100m 더 길다. 여기에는 탑과 함께 카나리 워프 전체 면적의 2배에 가까운 오피스 및 쇼핑 공간이 들어설 예정이다.

하지만 이 '기가 프로젝트'조차도 블랙 팬서 개봉 몇 달 전에 MBS가 발표한 네옴(Neom) 도시 계획에 비하면 곁다리에 불과하다. 네옴은 사우디 반도 남서쪽에 계획된 500억달러 규모, 1만 평방마일 크기의 도시다. 번쩍이는 홍보 영상은 네옴 프로젝트를 "한 나라 크기의 스타트업"이라고 소개한다.

네옴시티 더라인네옴시티 더라인
현재까지 네옴의 가장 완전한 버전은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 전시된 것이다. '무중력 도시'라는 제목의 이 전시회에서는 네옴의 중심 작품인 '더 라인'의 첫 모형을 볼 수 있다. 170km 사막을 가로질러 일직선으로 뻗은 도시 위에 500m 높이의 고층 빌딩 두 채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상이다.

네옴의 건축에는 유럽중앙은행을 설계한 쿱 힘멜블라우, 스미소니언 국립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 문화 박물관을 설계한 아자예 어소시에이츠, 모포시스 등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건축 회사들이 참여했다. 모형에서 더 라인의 외벽은 반사형 태양광 전지판으로 이루어져 내부의 도시를 충전한다. 두 건물 사이의 공간은 계곡과 같으며 60년 전 피터 쿡과 아키그램이 '플러그인 시티'를 설계한 이래 아방가르드 건축의 특징인 튀어나온 다각형, 직각, 작은 방울들로 채워져 있다.

바로 그 피터 쿡의 사무실이 더 라인의 한 부분을 설계하고 있다. 영상 조감도에서 스카이브릿지로 연결된 돌출형 발코니와 공중정원이 딸린 모듈형 아파트가 밀실공포증을 일으킬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관개에 엄청난 양의 물이 필요할 것임을 암시한다. 영화에서 와칸다의 골든시티는 대중교통을 강조했지만 더 라인은 오래 전부터 선전하던 개인용 헬리콥터 택시를 위해 설계된 것으로 보인다. 개인 헬리콥터 택시는 최근 리야드에서 첫 시험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바 있다.

사우디가 제시하는 네옴의 구상에서 어느 정도가 현실적인지 분간하기란 어렵다. 많은 부분이 획기적인 기술에 의존하고 있고, 이 정도 규모의 벤처 사업에 대한 선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급여로 많은 돈을 투입하면서 발생하는 왜곡 효과도 있다.

많은 컨설턴트, 디자인 회사 및 건축사무소가 돈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장단에 맞춰주는 게 그들의 이익에 부합한다. 네옴의 채용 페이지에는 어류 복지 관리자부터 음악 교사, 금융 데이터 모델러에 이르기까지 300개 이상의 채용 공고가 올라와 있으며, 모두 급여가 매우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불로소득을 계속 누리려면 왜 돈이 쉽게 벌리나 의문을 가지면 안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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