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가야 해" 사람 가득 실은 배 30분 만에 침몰…292명 대참사[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류원혜 기자 2023.10.10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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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1993년 서해페리호 침몰 사고./사진=온라인 커뮤니티1993년 서해페리호 침몰 사고./사진=온라인 커뮤니티


30년 전인 1993년 10월 10일. 전북 부안군 위도에서 낚시를 마친 사람들은 집으로 가기 위해 육지로 향하는 '서해페리호'를 기다렸다. 주민들도 김장철을 앞두고 멸치 등을 육지에서 판매할 기대감에 부풀었다.

하지만 기대감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됐다. 사람들을 가득 싣고 육지로 가던 배는 갑자기 뒤집어졌고, 이 사고로 배에 타고 있던 승객 중 292명이 숨졌다. 선박 관리 미비와 인력 관리 부실 등 안전사고 예방이 되지 않은 예견된 사고였다.



탑승 정원보다 141명 초과…30분 만에 가라앉은 배
110톤 규모의 서해페리호는 1990년 만들어진 신형 여객선이었지만, 이용객이 많지 않아 매년 적자에 허덕였다. 그러나 위도에서 육지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에 운항을 멈출 수 없었고,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아 하루 1회 가까스로 운항했다.

그런데 항상 텅텅 비어있던 배는 위도가 낚시 관광지로 떠오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주말마다 수백명이 이 배를 타고 낚시를 하러 오갔다. 일요일이었던 사건 당일 오전에도 배는 낚시를 즐긴 사람들로 가득했다. 김장철을 맞아 멸치액젓을 팔러 나가는 주민들도 많았다.



탑승 정원은 선원 14명을 포함해 정원 221명이었다. 하지만 하루 왕복 1회만 운항했기 때문에 당시 배에는 이를 초과한 362명(승객 355명, 선원 7명)이 올라탔다.

설상가상으로 파도 높이가 2m를 넘어 배를 운항하기 힘든 날씨였다. 기상청에서도 '파도가 높고 돌풍이 예상되므로 항해 선박에 주의를 필요로 한다'는 방송을 내보냈다.

악천후에 출항이 연기될 것 같았지만, 육지로 나가려는 승객들의 요구에 배는 그대로 바다로 향했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사람들은 배를 놓치면 하루를 더 있어야 했기 때문에 출항을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이는 곧 대참사의 원인이 됐다. 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앞으로 쏠린 승객들의 짐과 수톤(t)에 달하는 멸치액젓은 배가 중심을 잃게 했다. 짐을 쉽게 내리기 위해 화물칸에 두지 않고 배 앞머리에 둔 것이다.

심지어 362명이 탑승한 배에 안전요원은 2명뿐이었다. 또 항해사가 휴가로 없어 갑판장이 업무를 대신하기도 했다. 승객들이 구명조끼 등 안전 장비도 착용하지 않아 피해가 커졌다.

선장은 출항 30분 만에 높은 파도와 돌풍으로 운항이 어려워 보이자 회항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뱃머리를 돌리면서 중심을 잃은 배는 결국 뒤집어져 침몰했다. 1993년이라 휴대전화가 없는 승객들이 많아 구조 신호도 보내지 못했다.

사고를 목격한 어선들은 조난 신고를 한 뒤 구조에 나섰다. 이들은 해경과 구조대가 오기 전에 약 1시간 동안 승객 40명을 구했다. 아이스박스 등에 매달려 탈출한 승객도 있었다. 구조 작업은 밤까지 이어졌고, 총 70명이 목숨을 건졌다. 나머지 승객 292명은 시신으로 발견됐다.

확인되지 않는 승선 인원, 애타는 가족들…사고 이후 바뀐 것은
선장은 사고 당시 혼자 탈출해 도망간 것으로 알려져 수배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는 사고 5일 뒤 침몰한 배의 통신실에서 발견됐다. 구조 신호를 보내다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됐다. 선장과 함께 도피 의혹을 받고 있던 갑판장과 기관장도 숨진 채 발견됐다.

검찰은 과승과 과적, 운항 부주의, 부족한 방수구 등을 직접적인 사고 원인으로 발표했다. 현장 조사를 하지 않고 안전 점검표를 작성한 혐의(허위공문서 작성 등)로 기소된 전 군산지방해운항만청 선박검사관 A씨는 1995년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숨진 292명 중 150여명은 보험에 가입해 총 60억7000만원을 배상받았다. 몇몇 유족들은 국가와 해운 조합, 서해 페리 주식회사 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1인당 2~4억원씩 총 24억원의 배상금을 받았다.

법원은 사고 관계자들의 책임이 80~90%를 차지하는 등 매우 과중하다면서도 유족들의 과실을 일부 인정했다.

당시 재판부는 "국가와 해운 조합, 선박회사 등은 공동불법행위자로서 희생자들과 유족이 입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면서도 "승객들이 선장에게 출항하라고 강요했던 것 등도 사고 발생 원인이 되었으므로 과실 20%를 인정한다"고 판시했다.

사고 이후에는 그동안 형식적으로 이뤄지던 승선자 인원 및 신원 증명 규정이 강화됐다. 현행 해운법에 따르면 여객선에 승선하는 사람들은 발권하면서 승선 신고서에 △이름 △성별 △생년월일 △연락처 등 인적 사항을 적고 승선 수속 과정에서 확인받아야 한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이후에는 승객 신원 확인 절차를 강화하기 위해 승선권을 전산 발권하는 제도가 시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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