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었네" 눈물 뒤 "김일성 덕"…그 한마디에 담긴 분단 간극[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김지산 기자 2023.09.20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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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1985년 9월 첫 남북 이산가족 상봉 현장. 지학순 주교가 평양에서 동생 용화씨를 만나는 장면./사진=국가기록원1985년 9월 첫 남북 이산가족 상봉 현장. 지학순 주교가 평양에서 동생 용화씨를 만나는 장면./사진=국가기록원


남북 이산가족 100명(남북 각각 50명)이 남으로, 북으로 향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들이닥친 조국 분단 40년만인 1985년 9월20일의 일이다.

이날 남북 양측 예술공연단 각각 50명이 함께 상대 지역으로 떠났다. 한국 측 인솔자 김상협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50명, 공연단 50명, 취재기자 30명, 자원봉사자 20명 등 151명이 판문점을 거쳐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며 평양에 도착했다.



북한에서는 인솔자 손성필 북한적십자회 위원장을 비롯해 남쪽과 똑같은 인원이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에 짐을 풀었다.

이산가족 상봉과 공연은 21일과 22일 이틀간 진행됐다.



북한 고향 땅을 밟은 홍성철 전 내무장관 겸 한국식품공업협회장은 북한에 홀로 남은 누님을 생각하며 며칠째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고. 그는 "고향 방문단으로 평양에 가게 된다는 통보를 받고 누님께 드릴 파라솔 내복과 시계, 양말 등을 선물로 준비했다"며 "꼭 살아계실 것으로 굳게 믿으며 방문 기간 중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다"고 기대감을 피력했다.

혈육 상봉 현장은 눈물바다였다. 그 해 9월21일자 경향신문 기사 중 일부(7면)다.

'... 10호실에서는 형과 형수가 북측 안내원을 따라와 대기하고 있던 중 객실에서 내려온 동생 창석씨가 방문에 들어서는 순간 세 사람은 서로 달려들어 얼싸안은 채 "형님, 항성이 형님, 살아 계셨군요" "창석아 창석아. 이게 얼마 만이냐" "얼마나 고생했소" 울부짖음이 두 형제 사이에서 그칠 줄 몰랐다. 진한 혈육의 만남은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황준근 목사가 평양 고려호텔에서 어머니를 만나는 장면. /사진=국가기록원황준근 목사가 평양 고려호텔에서 어머니를 만나는 장면. /사진=국가기록원
아무리 혈육이라지만 분단 40년은 형제간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을 만들었다.


'10여분 뒤 가까스로 진정한 창석씨는 우리측 TV카메라 마이크를 잡고 "여러분 감사합니다. 우리 가족이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여러분과 하나님의 덕분입니다"라고 인사했다. 그러나 북측의 형은 "모든 것이 김일성 수령님의 덕분이죠"라고 말해 갑자기 분위기가 굳어졌다.'

1945년 남북 분단 이후 첫 이산가족 상봉은 지루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1971년 8월12일 대한적십자사 최두선 총재가 특별성명을 통해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한 게 첫 단추였다. 북한 적십자 중앙위원회 손성필 위원장이 호응해오면서 대화는 물꼬를 텄다.

금방 성사될 것 같았던 이산가족 상봉은 무려 14년이 걸려서야 이뤄졌다. 대상 인원도 남북한 통틀어 고작 100명이었다.

본격적인 이산가족 문제 해결 노력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였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시절 활발하게 진행됐지만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과 맞물려 북한의 핵 개발과 금강산에서 박왕자씨 피살사건, 2010년 천안함 피격, 이산가족의 고령화 등으로 이산가족 상봉은 동력을 잃어갔다.
서울을 방문한 북한 측 고향방문단의 가족상봉 장면. /사진=국가기록원서울을 방문한 북한 측 고향방문단의 가족상봉 장면. /사진=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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