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헌, 미완의 비전…그의 노트에는 '미래'와 '도전'이 빼곡했다

머니투데이 최경민 기자 2023.08.12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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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연지동 현대그룹 본사에서 지난 4일부터 진행되고 있는 '정몽헌의 도전, 다시 현대' 사진전. 사진전은 오는 18일까지 이어진다./사진=최경민 기자서울 연지동 현대그룹 본사에서 지난 4일부터 진행되고 있는 '정몽헌의 도전, 다시 현대' 사진전. 사진전은 오는 18일까지 이어진다./사진=최경민 기자


90년 경영방침
-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
- 반도체 디자인센터(Design Center)
- 컴퓨터 PC 워크 스테이션(Work Station)

고(故)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노트에는 이같은 내용들이 빼곡히 들어있었다. 현대그룹이 정 회장의 20주기를 맞아 지난 4일부터 오는 18일까지 서울 연지동 본사에서 진행하는 '정몽헌의 도전, 다시 현대' 사진전을 통해 최초 공개한 노트다.



11일 현장에서 직접 확인한 노트를 볼 때 정 회장은 '미래'와 '도전'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1990년 당시부터 실리콘밸리를 축으로 하는 혁신, 반도체·컴퓨터와 같은 새로운 먹거리를 두고 고민을 거듭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성 등 우주산업도 그의 큰 관심사였다고 한다.

정 회장의 철학은 어록에도 고스란히 남았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의욕, 한계를 넘어서려는 도전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1986년 송년사), "모험과 도전을 기피하는 자, 관행과 비능률 속에 정체하는 조직은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1986년 정례조회), "기술이 핵심이며 기술은 사람이 하는 것"(1993년 인터뷰) 등의 말들이 사진전 현장을 수놓고 있었다.
20주기를 맞아 최초 공개한 故 정몽헌 회장의 노트/사진=최경민 기자20주기를 맞아 최초 공개한 故 정몽헌 회장의 노트/사진=최경민 기자
정 회장의 비전과 구상은 미완(未完)에 그쳤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5남으로, 후계자에 낙점됐으나 순탄한 길을 걷지 못했다. 2001년 현대전자·현대건설이 워크아웃에 들어간 이후에는 정치권의 소용돌이에도 휘말렸다. 대북송금 사건으로 검찰 조사를 받다가 2003년 타계했다. 그의 충격적인 죽음 이후 아내 현정은 회장이 분투했지만 현대그룹은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아산, 현대무벡스를 포괄하는 수준으로 축소됐다.



악재는 아직 남았다. 다국적 승강기 업체 쉰들러가 현대엘리베이터를 노리는 것으로 파악된다. 현대엘리베이터의 2대주주인 쉰들러 측은 현대엘리베이터가 5개 금융사와 파생상품 계약을 맺은 것을 문제 삼아 소송을 제기했고, 승소했다. 현정은 회장 지분을 상대로 강제집행 절차에 들어가며 노골적으로 현대엘리베이터 경영권을 노렸다. 현 회장이 대출 등을 통해 배상금 1700억원과 지연이자를 전액 마련했지만, 이후에도 쉰들러는 지분을 소량씩 팔며 현대엘리베이터의 주가를 흔들고 있다.

현 회장은 지배구조 강화에 나섰다. 그는 지난달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보유 전량(319만6209주, 7.83%)을 현대네트워크에 매각했다. 현대네트워크는 현 회장 일가가 지분 100%를 가진 회사이면서 동시에 현대엘리베이터의 최대주주다. 현대네트워크의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율은 기존 10.61%에서 19.26%로 올랐다. 총수일가→현대네트워크→현대엘리베이터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강화한 것이다.
 '정몽헌의 도전, 다시 현대' 사진전에서 공개한 정몽헌 회장의 유품. 정 회장이 차던 시계의 가격은 5만원 수준에 불과했다 한다. /사진=최경민 기자 '정몽헌의 도전, 다시 현대' 사진전에서 공개한 정몽헌 회장의 유품. 정 회장이 차던 시계의 가격은 5만원 수준에 불과했다 한다. /사진=최경민 기자
사업 축소에 이어 경영권 공방전까지 펼치고 있는 상황에서 '정몽헌 20주기'를 맞는 현대그룹의 각오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미래와 도전을 중시했던 정 회장이 남긴 '미완의 비전'을 반드시 실현하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사진전의 이름이 '다시 현대'이기도 했다. 정 회장을 일컫는 수식어로는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을 앞세웠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20주기 전시회를 단순 과거를 회고하고 추모하는 콘셉트로 준비하지 않았다"며 "정몽헌 회장이 남긴 정신과 유산이 미래의 가치로 연결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실제 현대그룹은 현대엘리베이터를 중심으로 '다시 현대'를 실현하기 위한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단군 이래 최대 재건축 현장'으로 불리는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 재건축(올림픽파크 포레온) 1~3단지의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전량 314대를 수주하며 건재를 알렸다. 수주 금액은 434억원으로 창립 이후 역대 최대 규모였다.
故 정몽헌 회장 20주기 추모 사진전을 찾은 현정은 회장/사진=현대그룹故 정몽헌 회장 20주기 추모 사진전을 찾은 현정은 회장/사진=현대그룹
정 회장의 유지를 이어가듯 미래사업 추진도 한창이다. 이날 현대엘리베이터는 삼성물산과 손잡고 모듈러 공법 전용 엘리베이터를 개발하기로 했다. 건축 부재의 70% 이상을 공장에서 사전 제작한 뒤 공사 현장에서는 설치와 내외장 마감 등만 진행하는 방식이다. 지난달에는 KT, LG전자와 엘리베이터와 로봇 연동 서비스 기획·발굴을 함께하기로 했다. 택배, 배달, 호텔, 의료 등에 적용할 수 있는 신사업이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신기술을 바탕으로 사우디아라비아 네옴시티 및 인도네시아 신수도 건설 등 해외 시장을 개척하는 것까지 기대하고 있다. 베트남 등 엘리베이터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신흥국도 진출 대상이다. 중국법인은 2030년 현지 시장점유율 5.9% 달성을 목표로 잡았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정몽헌 회장이 쌓아올린 업적을 돌아보며 끊임없이 도전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연지동 현대그룹 본사에서 지난 4일부터 진행되고 있는 '정몽헌의 도전, 다시 현대' 사진전. 사진전은 오는 18일까지 이어진다./사진=최경민 기자서울 연지동 현대그룹 본사에서 지난 4일부터 진행되고 있는 '정몽헌의 도전, 다시 현대' 사진전. 사진전은 오는 18일까지 이어진다./사진=최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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