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과 하이브 걸그룹의 현재 '르세라핌 VS 에스파'

머니투데이 김성대(대중음악 평론가) ize 기자 2023.05.16 11:19
글자크기
르세라핌(왼쪽) 에스파. 사진제공=쏘스뮤직, SM엔터테인먼트르세라핌(왼쪽) 에스파. 사진제공=쏘스뮤직, SM엔터테인먼트


오리무중이던 회사 경영권의 향방과 과열 양상으로 치닫던 양사 인수전이 정리되고 그 중심에 있던 소속사(SM엔터테인먼트와 하이브 산하 레이블인 쏘스뮤직)의 주력 걸그룹들이 일주일 간격으로 신작을 내놓았다. 르세라핌의 'UNFORGIVEN'과 에스파의 'MY WORLD'다. 한 장은 기존 미니 앨범에 있던 곡들을 더한 13트랙 꽉찬 정규 앨범을 노렸고, 다른 한 장은 기존 콘셉트에서 한 발 물러나 가상과 현실의 느슨한 경계를 실천하는 미니 앨범을 표방했다.

르세라핌, 사진제공=쏘스뮤직르세라핌, 사진제공=쏘스뮤직


'월드 클래스' VS '마이 월드'

일단 르세라핌은 그룹의 위상을 위해 "월드 클래스"를 강조한 모양새다. 가령 타이틀 곡 'UNFORGIVEN'에 관여한 펠리 페라로(Feli Ferraro)와 벤자민(Benjmn)이 '달려라 방탄'을 만든 주인공이거나 제이지(Jay-Z)의 레이블 락 네이션(Roc Nation) 소속이라는 걸 환기시키는 건 그걸 위한 장치처럼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휘파람 중 하나일 영화 '석양의 무법자' 메인 테마 샘플링을 원작자의 아들(Giovanni Morricone)에게 허락받은 사실이라든지, 월드 클래스의 완성을 위해 반드시 챙겨야 하는 라틴계 팬들을 위해 앨범 끝에 배치한 듯한 'Fire in the Belly' 역시 그 전략의 일부로 받아들여질 만 하다.



반면 에스파는 객관적인 '월드' 대신 주관적인 세상('My World')을 내세웠다. 자신들은 지구마저 벗어난 아예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건데, 메타버스를 잠시 지우고 그들이 강조하는 '리얼월드'라는 부언(附言)은 끊임없이 그 사실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 리얼월드를 방문한 에스파의 새 음악은 케이팝의 본질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북유럽 프로듀서, 송라이터들에게서 나왔다. 퀸 라티파(Queen Latifah)로 데뷔해 샤이니와 에프엑스를 통해 SM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덴마크 프로듀서 겸 작곡가 미치 한센을 중심으로 스웨덴 프로듀싱 그룹 문샤인(Moonshine), 노르웨이 싱어송라이터 안느 주디스 위크(Anne Judith Wik) 등이 그들이다. 이들 외엔 영국 출신 긱보이(Geek Boy Al Swettenham)와 카일러 니코(Kyler Niko), 텍사스 출신 폴리나 세릴라(Paulina "PAU" Cerrilla), 그리고 최진석(JINBYJIN) 정도가 에스파의 신작에서 북유럽권 변방의 이름들일 것이다.

에스파, 사진제공=SM엔터테인먼트에스파, 사진제공=SM엔터테인먼트
레트로


르세라핌은 작금의 히트 공식 중 하나인 레트로 요소를 전면(全面)은 아닐지언정 전면(前面)에 내세워 40대 이상 팬들의 관심을 구한다. 타이틀 곡 'UNFORGIVEN' 얘기인데, 곡 제목과 샘플링 된 음원의 출처에서 공통으로 추출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이름은 자연스레 이 곡에 아이디어를 보탠 지천명의 하이브 총괄 프로듀서 방시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표면적인 것일 뿐, 쏘스뮤직이 적극 홍보한 펑크(Funk) 기타리스트 겸 프로듀서 나일 로저스(Nile Rodgers)의 피처링은 시크(Chic) 시절 'Good Times' 같은 곡에서 들려준 "펑크 리듬의 진수"와 '용서받지 못한 자'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이스트우드의 원작을 아는 세대에겐 스타일과 주제 면에서 어쩔 수 없는 위화감을 줄 것으로 보여 조금 아쉽다(그래도 식당 안으로 돌진하는 뮤직비디오의 첫 장면은 꽤 인상적이었다).

또한 방시혁이라는 존재는 반드시 앨범이란 형식으로 발표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굳이 지난 곡들까지 가져와 앨범 모습을 갖추려는 의지의 시발점으로도 보인다. 아무래도 그는 싱글보단 앨범이 예술적 가치로 인정받던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일 거다. 사람은 기회가 되면 자신의 경험을 어떤 식으로든 현재에 반영하기 마련. 르세라핌의 이번 '정규작'이 내겐 그래보였다. 그리고 그런 과거의 향기는 아리아나 그란데의 'thank u, next'를 연상시킨다는 평가를 받은 에스파의 'Thirsty'에서도 피어오른다. 르세라핌의 'Flash Forward'처럼 사랑에 빠지는 감정을 빌려 이들은 해당 곡의 뮤직비디오를 통해 'Forever (약속)'이나 'Dreams Come True'와 다른 차원의 레트로 바이브를 구축하는 것이다. 끝내 이러한 두 작품의 과거 성향은 31년 전 페미니즘 소설 제목('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에서 영감을 얻어 "난 인형이 아냐"라고 선언하는 르세라핌의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가 단호히 매듭 짓는다. 그 시절의 레트로가 이 시절의 뉴트로로 전환하는 순간이다.

르세라핌, 사진제공=쏘스뮤직르세라핌, 사진제공=쏘스뮤직
스토리텔링

케이팝 걸그룹들은 늘 콘셉트와 이야기를 음악에 녹인다. 에스파와 르세라핌도 다르지 않다. 블랙 맘바를 잡으러 다녔던 '메타버스 걸그룹' 에스파는 현실로 왔고, 르세라핌은 다리를 태우며(Burn the Bridge) 그룹의 새로운 여정이 시작됐다는 걸 알렸다. 특히 가상을 떠나 지상을 밟은 에스파는 모두가 '가짜'로 살아가는 소셜미디어 세상의 병폐를 노래한 'I'm Unhappy' 같은 곡까지 들려주며 팀의 복귀가 모종의 성찰에도 기반해 있다는 걸 들려준다. 하지만 지구로 왔다고 해서 그들의 음악까지 송두리째 바뀐 건 아니다. 'Spicy'가 대표하듯 긴장감 넘치는 신스 베이스로 여전히 힘있는 그루브를 유지하고 있고, 무표정하고 무덤덤한 창법과 랩도 딱히 변함이 없다. 'YEPPI YEPPI' 정도의 카리스마나 구성력까진 아니어도 'Spicy' 역시 일렉트로닉 소스에 환호하는 팬들에겐 충분히 어필할 트랙이다. 한편 르세라핌은 이야기를 제작 영역에까지 데려간다. 가령 색채 연구소 팬톤(Pantone)이 발표한 올해의 컬러 '비바 마젠타(Viva Magenta)'를 작품과 그룹의 대표 색깔로 설정하는 식이다. 홍보에서 밝혔듯 비바 마젠타는 붉은 계열 색상으로, 대담하면서 포용력이 느껴지는 해당 색의 천연염료인 연지벌레가 르세라핌과 닮았다는 얘기다. 빨간색 때문에 자연에서 생존하기 어려우면서도 버티고 살아남아 귀한 존재가 된다는 건데, 이를 르세라핌이 지향하는 바에 엮었다. 색채에서 스토리텔링을 이끌어낸 사례다.

에스파, 사진제공=SM엔터테인먼트에스파, 사진제공=SM엔터테인먼트
자신감 또는 주체성

르세라핌을 한마디로 하면 '자신감'이다. 자신감은 '주체성'과 함께 지금 국내 4세대 걸그룹들의 같은 지향점이기도 하다. 남들이 뭐라든 그들이 어디를 가리키든 나는 개의치 않고 내 길을 가겠다는 것. 르세라핌은 1년 전부터 에스파의 노래 가사처럼 "다른 언어 속에서 같은 의미를 가진" 3개국어로 선언과 으름장을 오가며 자신감과 주체성에 기반한 자신의 정체성을 누차 누설해왔다. 베이스 하우스 위에서 세상이 자신들이 목넘김 할 굴(oyster)이라 선언하며 그들은 데뷔했던 거다. 르세라핌은 새 앨범에서도 그 기세를 누그러뜨릴 생각이 없어 보인다. 'Burn the Bridge'의 첫 내레이션 소절을 보라. "나에 대한 확신이 있다. 자신감." 이 자신감은 90년대 여성 록 밴드 홀(Hole) 느낌이 나던 'No Celestial' 같은 펑크(Punk) 트랙과는 다르지만 비슷한 에너지를 품은 브라스(brass)를 타고 직진하는 'No-Return (Into the Unknown)' 같은 곡까지도 이어진다. 우린 어쨌든 'LE SSERAFIM'이 'IM FEARLESS'의 애너그램이란 걸 기억해야 한다. 이 그룹은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는 걸 계속 얘기하려는 팀이다. 이는 에스파의 지젤이 'Spicy'에서 "난 10점 만점에 10점"이라고 말하는 자신감과 비슷하다 할 수도 있다. 단, 에스파의 자신감은 거의가 어둠에서 피어났던 만큼 자신들 음악이 지닌 맛을 그대로 표현한 'Salty & Sweet'이 가진 "섬뜩한" 확신에서 그 유사성은 분명한 차이를 전제한다. 세상은 그들의 신작이 밝고 맑아졌다는 듯 말하지만 아직 그들 음악은 그럴 생각이 없다. 영국 음악지 'NME'가 에스파의 새 앨범을 놓고 "그룹 특유의 사운드를 희석시키지는 못했다"고 말한 이유다.

에스파, 사진제공=SM엔터테인먼트에스파, 사진제공=SM엔터테인먼트
팬을 위한 노래

우연인지 르세라핌과 에스파는 새 작품에 똑같이 팬들을 위한 노래를 실었다. 르세라핌은 '피어나 (Between you, me and the lamppost)'라는 곡에서 "항상 웃을 순 없다 해도 함께 있다면 충분"하다며 팬덤에 고백했고, 에스파는 ''Til We Meet Again'이라는 트랙에 "음악의 힘이 우릴 이어줄 거야"라는 메시지를 담아 팬들에게 띄웠다. 에스파의 경우 첫 곡 'Welcom to MY World'에서 'MY'가 팬덤 마이(MY)를 뜻할 수 있다는 걸 감안하면 이들은 사실상 두 곡의 팬송을 작업한 것일 수도 있다. 지난 3월 열린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 VR콘서트에 등장할 뻔한 가상 멤버 나이비스(nævis)가 도입부를 부르며 시작하는 'Welcome to MY World'는 작사가 엘리 서(Ellie Suh)가 NCT DREAM의 '고래 (Dive Into You)'를 예로 들며 한 말처럼 "스토리도 있고 귀에 편하게 들리는 가사"를 무기로 정서 상 앨범의 시작과 끝을 아우른 셈이다. 이건 또한 멤버 모두가 작사에 참여한 것을 넘어 허윤진이 프로듀서로도 이름을 올린 '피어나'에도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일지 모른다. 하긴,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 팀이 팬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진심은 같은 하나가 아닐까 싶다. 르세라핌의 오리지널 스토리 '크림슨 하트'를 상징한 문구를 빌리자면 그것은 "혼자 하면 방황이지만 함께하면 모험이 된다" 정도가 될 것이다.

르세라핌, 사진제공=쏘스뮤직르세라핌, 사진제공=쏘스뮤직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