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산업은 국내 산업 중 업력이 가장 긴 분야다. 국내에서 가장 먼저 태동한 산업군이기 때문이다. 동화약품은 1897년에, 유한양행은 1926년에, 동아제약은 1936년에 설립됐다.
여러 제약업체가 본격적인 산업화를 이룬 것은 1950~1960대로 이때 경영을 주도했던 이들을 제약 창업 1세대로 부른다. 다른 산업부문과 마찬가지로 우리 제약산업도 발전기를 거치며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일본의 기술을 도입한 곳도 많았고 일부는 일본의 남긴 공장을 개조해 사업을 한 곳도 많았다. 시대가 변했지만 제약산업의 발전은 더뎠다.
그래서인지 제약 창업 1세대 중엔 '약 다운 약'을 만들어 국민 건강을 지키는 '제약보국'(製藥保國)을 강조하는 이들이 많다. 고 이종호 명예회장은 1970년대에 수액 한 병 납품할 때마다 원가가 안 나와, 팔수록 손해인 수액사업을 이어갈지 고민했다. 하지만 병원 불빛을 보며 "지금 이 순간에 저기서 꺼져가는 생명이 있는데 돈이 안 돼서 그만둔다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생명존중의 창업정신을 이어가 오늘이 됐다고 소회를 밝힌 바 있다.
김승호 명예회장은 과거 "제약인으로서 장삿속으로만 약을 만들지 않겠다"며 "많은 이들의 질병을 낫게하고 고통을 덜게해줄 수 있는 제약인이 되겠다"고 하기도 했다.
그런 마음들은 이미 통했던 모양이다. 1975년 당시 국내 주요 제약회사 30~40대 오너 경영인 8명이 친목 모임을 만들었다. 두 명예회장 이외에도 제약 맏형 강신호 동아쏘시오홀딩스 명예회장, 지난해 작고한 윤영환 대웅제약 회장 등이 모임의 멤버다.
'여덟 사람이 함께 나아가자'는 뜻으로 '팔진회(八進會)'로 이름을 지었다. 동종업계 경영인들이 이렇게 가깝게 지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팔진회 모임은 올해 초 48년의 동행을 마무리하고 공식 해체됐다. 남아있는 회비는 제약바이오산업 발전에 써달라며 제약협회에 기부했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는 것은 정해진 세상이 이치다. 바꿔 생각하면 앞물결이 닦아놓은 길을 뒷물결이 편안히 지나간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단순히 복제약 판매에 그치지 않고 신약연구소를 만들고 투자하는 문화를 만든 것은 1세대 경영인들이 남긴 유산이다. 후대 경영인들이 신약개발에 열중하는 것도 1세대 경영인들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단순히 실적만 추구하기보단 국민의 건강을 고려하는 경영문화도 1세대가 남긴 위대한 유산이다.
이 명예회장은 신약 관련, "꽃은 아직 안 피었지만 꽃밭은 내가 만들었잖아요. 내가 죽기 전에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신약 개발을 하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느냐, 하지만 안 된다고 하더라도 그걸 개발할 수 있는 길이라도 닦아놓으면 나는 만족한다"고 말한 바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제약 1세대의 시간은 저물고 있고, 이들의 아름다운 동행도 끝이 보인다. 확실한 건 그들이 남겨준 유산을 후대가 기억할 것이란 점이다. 오늘(3일)은 이종호 명예회장의 발인날이다. 그의 평안한 안식을 빈다.
![[광화문]제약 1세대의 위대한 유산](https://thumb.mt.co.kr/06/2023/05/2023050213592421084_1.jpg/dims/optimi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