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금 '쩐의 전쟁', 에너지 판 흔든다…美 IRA가 강력한 이유

머니투데이 권다희 기자 2023.04.10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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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넷제로 케이스스터디] 탄소중립은 정부의 정책, 기업, 시민사회 모두가 풀어가는 과제입니다. 많은 국가에서 탄소중립은 이미 '달성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한 논의를 지나 '어떻게 이행하느냐'의 논의로 진입한 상황입니다. 한국에 함의를 줄 수 있는 각 국가·기업·지역 사회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2년 8월 16일 IRA에 서명한 후 미국 워싱턴 백악관 스테이트 다이닝룸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민주당의 조 맨친 상원의원, 척 슈머 상원의원 등 참석자들의 박수를 받고 있다./로이터=뉴스1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2년 8월 16일 IRA에 서명한 후 미국 워싱턴 백악관 스테이트 다이닝룸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민주당의 조 맨친 상원의원, 척 슈머 상원의원 등 참석자들의 박수를 받고 있다./로이터=뉴스1


미국 IRA(인플레이션감축법)가 발효 8개월 만에 전세계 재생에너지·청정산업 시장의 '게임체인저'가 되고 있다. IRA의 보호무역적 성격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실제로 이 법이 글로벌 시장과 다른 국가의 에너지 정책에 미치는 파급력이 불과 수 개월 만에 목도된다. IRA의 어떤 요인이 연쇄적 영향을 만들고 있는 지 살펴봤다.

1. 시장을 움직이다..기업에 2030년까지 '현금' 쏘는 美 정부



IRA의 핵심은 전세계 관련 기업들이 호응할 수밖에 없는 인센티브를 미 정부가 제공했다는 점이다. 재생에너지·2차 전지 등의 관련 기업이 미국 안에서 생산·투자하면 미 정부가 지원금을 주는데, 핵심은 최종 생산재뿐 아니라 공급망 내 기업들이 모두 적용을 받는다는 점이다. 적용 대상과 금액이 명확하고 구체적인데다, 현금으로 직접 받을 수 있다.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올해 생산 분부터 2030년까지 장기간 적용이 보장되는 것도 기업을 끌어들이는 요인이다.

일단 지원금 절대 액수가 크고 지급 기준이 명확하다. 재생에너지·2차 전지 기업이 미국에서 생산할 때 받는 보조금 지급 액수를 명시적으로 기재한 IRA 섹션 45X에 따르면 태양광 부품의 경우, 태양광 웨이퍼(제곱미터 당 12달러), 모듈(와트당 7센트), 폴리실리콘(킬로그램 당 3달러) 등의 보조금이 부품 별로 책정돼 있다. 풍력발전도 발전기의 '날개' 블레이드(와트당 2센트), '모터' 넛셀(와트당 5센트), '기둥' 타워(와트당 3센트) 등 전체 공급망 내 부품이 지원 대상에 포함됐다. 2차 전지에선 베터리셀과 모듈 등이 각각 킬로와트시(kWh) 당 35달러, 10달러를 얻는다. 이를 미국 내 생산시설을 갖춘 국내 기업에 적용해보면 연 지원금 규모가 수천억 원대다. 한화솔루션의 경우 미국 조지아주 공장 모듈 연 생산능력(1.7GW) 풀 가동 시 1억1900만달러(약 1600억원)를 받는데, 올해 말까지 모듈 생산능력을 5.1GW로 늘리겠다 밝혔으므로, 향후 풀 가동 시 모듈 공제액으로만 3억5700만달러(약 4700억원)를 받을 수 있다. 풍력 타워를 만드는 씨에스윈드는 미국 공장을 증설해 3~4년 후 10GW 규모의 풍력 타워를 생산할 계획인데, 풀 가동된다면 약 3억달러(약 4000억원)의 보조금을 받는다. LG에너지솔루션은 올해 1분기에만 IRA로 번 돈을 1003억원으로 계상했다.



지난해 8월 IRA가 법제화 된 뒤 수혜 대상이 되는 전세계 기업들이 미국·북미 생산시설을 늘리는 이유다. 알리 자이디 백악관 기후보좌관은 이번주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IRA 발효 후인 지난 8월 이후 현재까지 전세계 배터리·전기차·재생에너지·수소 관련 기업들이 650억달러(약 85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한국 기업 중에도 한화솔루션, OCI, 씨에스윈드, LG에너지솔루션 등이 IRA 발효 후 미국 생산시설 증설을 결정했다.

이 법으로 미 정부가 얻고자 하는 건 자국 내 재생에너지·청정산업 기반 확대다. 미국 연방 정부는 2035년까지 전력망에서 화석연료 발전원을 '제로'로 만들 계획인데, 제조업 기반이 약한 미국으로서는 국외 자원을 가져와야 목표 달성이 가능하다. 조 바이든 정부에게 전력망 '넷제로'는 에너지 안보 제고의 수단일 뿐 아니라 전기요금 인하로 '표심'을 얻기 위해 정치적 이유로도 중요하다. 이 산업들의 공급망 전체를 미국 안으로 들여와 미국 내 제조업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것도 IRA의 핵심 목표다. 반대로 기업 입장에선 명확한 보조금 수령액에 더해 미 정부가 주도하는 미국 내 청정산업 수요 확대를 기대할 수 있다. IRA로 미 정부와 글로벌 기업들이 '윈윈' 하는 상황이 설계된 것이다.

이 때문에 IRA발 대미투자는 미국 정부의 당초 예상보다 늘어날 수 있다고 관측된다. 미국 의회예산처(CBO)는 향후 10년간 IRA의 청정에너지·산업 관련 예산을 약 4000억달러로 추산했지만, IRA가 상당 분야에 지원 상한선을 설정하지 않아 미 정부가 투입하는 돈은 더 늘어날 수 있다. 골드만삭스는 IRA 집행을 위한 미 정부 예산이 1조6000억달러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전망한다.


보조금 '쩐의 전쟁', 에너지 판 흔든다…美 IRA가 강력한 이유
2. 공화당 텃밭으로 몰리는 IRA발 투자…美 정권 바뀌어도 지속가능

미국 내 정권이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바뀌어도 IRA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 또한 IRA의 영향력을 배가시키는 대목이다. 지난해 공화당 상원은 IRA 표결에서 전원 반대(민주당 51대 공화당 50)표를 던졌지만, 역설적이게도 IRA의 수혜는 공화당 우세 지역에 집중되고 있다.

미국 비영리 에너지 싱크탱크 RMI는 향후 10년간 IRA 관련 투자액을 주 별로 예상했는데, 공화당 '텃밭' 텍사스가 1310억달러(약 173조원)로 가장 컸고, 역시 '레드 스테이트'인 플로리다주가 620억달러로 세번째였다. 투자액을 인구수로 나눈 1인당 예상 투자액을 보면, 공화당 우세주인 와이오밍주와 노스다코타주가 각각 1만2300달러, 1만700달러로 미국 전체 주 중에서 가장 크다.

육상풍력·태양광 발전은 인구 밀도가 낮고 사막·산악 지형이 있는 중부 지역이 유리한데, 이 지역이 대부분 공화당 우세주인 영향이다. 텍사스의 경우 이미 미국 최대 풍력발전지로 '미국 풍력발전의 요새'로 불린다. 여기에 IRA는 탄소포집저장(CCS)에 대한 지원을 별도로 책정했는데, 이 지원의 최대 혜택 기업이 텍사스에 본부를 둔 대표적 공화당 후원기업 엑손모빌이다. 엑손모빌은 현재 멕시코만에서 1000억달러 규모의 CCS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공화당 우세주에 재생에너지 프로젝트가 집중되다 보니 일자리 성장도 이 지역들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싱크탱크 겸 환경단체인 클라이밋 파워에 따르면 IRA가 발효된 지난해 8월과 지난 1월 사이 미국 31개 주에서 10만개의 신규 일자리 계획이 발표됐는데, 이 일자리 중 상당수가 공화당 우세주의 90여 개 청정 에너지 프로젝트에서 만들어졌다. RMI 추산에 따르면 2030년까지 IRA로 만들어질 새 일자리 수는 캘리포니아(14만명)에 이어 텍사스(11만6000명), 플로리다(8만5000명) 순서로 많다. 크리스 쿤스 상원의원(민주·델라웨어)은 이코노미스트에 "상원 공화당 의원들로부터 2024년(미 대선)에 IRA를 완전히 폐지하기 바란다는 얘기가 들리지 않는다"며 "휴스턴(텍사스의 도시)이 시카고(민주당 우세주인 일리노이의 도시)만큼 혜택을 입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2030년까지 IRA로 창출될 잠재적 신규 일자리 수 추정치   출처: RMI, https://rmi.org/economic-tides-just-turned-for-states/2030년까지 IRA로 창출될 잠재적 신규 일자리 수 추정치 출처: RMI, https://rmi.org/economic-tides-just-turned-for-states/
3. 美 비판하면서도 따라가는 EU..유럽 기업들 "IRA 좋다"

미국이 천문학적 돈을 들여 자국 내 재생에너지·청정산업 공급망 구축에 나서자 다른 국가들은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적 행태를 비판하면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따라가고 있다. 자국 내 청정산업 제조업 기반이 미국으로 빠져나가는 '공동화' 우려에 따른 후속 조치다.

유럽연합(EU)을 압박하는 건 유럽 대기업들이다. IRA 발효 후 EU가 미국 정부에 날을 세울 때 유럽 기업들은 IRA를 옹호하며 EU도 미국식의 인센티브를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EU도 재생에너지·전기차 등에 보조금을 지급하지만 IRA는 구조가 단순하고 10년이라는 장기간의 혜택을 약속한다는 점에서 기업들에게 매력적이다. 스페인 에너지 대기업 이베르드롤라의 이그나치오 갈란 회장은 IRA발효 직후인 지난해 10월 "이제 재생에너지에 대한 투자 인센티브가 유럽 보다 미국에서 더 커졌다"고 했다. 스페인 에너지 기업 랩솔의 효수 욘 이마즈 CEO도 지난달 초 로이터에 "EU가 채찍에서 당근으로 이동하는 걸 본다면 좋을 것"이라 했다. 랩솔은 올해 프로젝트 예산의 40%를 미국에 투입하는데, 이는 자국 스페인(25%)에 하는 투자 보다 크다. 수소 사업을 하는 독일 화학기업 린데의 산지브 람바 CEO 역시 "우리는 IRA를 좋아한다"며 IRA가 EU의 긴 정책 성명보다 더 간단하고 이해하기 쉽다고 했다. 프랑스 에너지 기업 토탈의 패트릭 푸얀 CEO도 IRA가 "그린 인프라 가속화로의 초대"라 했으며, 독일 에너지 기업 RWE 역시 미국 사업을 늘리는 데 IRA가 핵심 원동력이 됐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IRA 수혜를 노린 유럽 대기업들의 북미행은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14일 캐나다에 첫 배터리 공장을 짓는다고 공표한 폭스바겐이 대표적이다. 폭스바겐의 이사회 구성원인 토마스 슈말은 지난달 EU 측 인사들과의 회의 다음날 자신의 SNS에 "오늘날 배터리 사업은 아시아 기업들에게 주도되고 있고, 미국은 IRA로 따라 잡으려 하고, 유럽은 더욱더 뒤처지고 있다'며 "IRA의 조건들은 매우 매력적이고, 유럽은 향후 수개월, 수년간 결정될 수십억 달러의 투자 경주에서 질 위험에 처해있다"고 했다. EU가 IRA만큼 실효적인 지원책을 내놓을 것을 압박한 것이다. BMW 역시 지난 2월 멕시코에 8억 유로를 들여 전기차 공장을 지을 것이라 발표했다. 스웨덴 배터리 기업 노스볼트 역시 지난해 10월 유럽보다 미국이 증설 우선 지역이 될 거라 밝힌 데 이어, 올해 여름 전 구체적 대미투자 규모를 밝히겠다고 지난 2월 밝혔다.

결국 EU 행정부인 EC(EU 집행위원회)는 지난달 9일 2025년까지 제조업 전략적 장비, 배터리, 태양광, 풍력터빈, 히트범프, 수전해기, CCUS 등에 이른바 '매칭 보조금'을 주는 내용을 담은 '임시적 위기와 전환 프레임워크'를 채택했다. 지난해 3월 내놓은 '임시 위기 프레임워크'를 수정한 이 안은 기업 입장에서 아직 구체적 적용이 어려운 가이드라인 수준이나, EU가 미국의 IRA를 의식해 내놓은 '인센티브 경쟁'의 신호탄으로 해석됐다. 캐나다 정부도 IRA 대응을 위해 지난주 청정에너지 세액공제(600억달러), 지속가능 인프라 투자(200억달러) 등 800억달러 규모의 지원책을 발표했다. 각국이 IRA발 '보조금 경쟁'을 경계하면서도 재생에너지·청정산업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유사한 정책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다만 장기적으로 IRA가 전세계 탄소저감에 긍정적일 수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벨기에 소재 싱크탱크 브뤼겔은 지난 2월 'EU는 어떻게 IRA에 대응해야 하나'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IRA는 미국의 탈탄소화를 상당히 가속화시킬 테지만 미국 외 지역의 탈탄소화에는 초기에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했다. 미국이 '비효율적 공급망 재구축'을 강제하고 다른 곳의 탈탄소화에 필요한 자원을 미국으로 끌어 들여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IRA는 전세계 청정기술 비용을 절감할 것이고, 전세계 청정기술 수요 규모를 키우며, 지식의 '스필오버'를 통해 미국 외 다른 세계에 간접적으로 이득을 줄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이런 이점들은 비용 보다 클 것"이라 짚었다. 브뤼겔은 "이에 더해 IRA로 미국이 온실가스 저감에 대해 진지한 국가들의 일원이 되면서 전세계 정치와 외교에 이득을 줄 것"이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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