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옥 화풍 이어받은 '판도라', 밑그림은 글쎄

머니투데이 이덕행 기자 ize 기자 2023.03.14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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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tvN사진제공=tvN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판도라는 제우스가 신들을 총동원해 만든 인류 최초의 여자다. 고대 그리스어로 판(Pan)은 '모든 것', 도라(Dora)는 '선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판도라는 올림포스 신들에게 능력을 부여 받아 완벽한 여자로 탄생했다. 그러나 판도라는 "절대 열지 말라"고 경고했던 상자(항아리)를 열어 인간세계에 만악의 근원을 퍼뜨렸다. 이후 '판도라의 상자'는 열면 안 되지만 열었을 경우 큰 충격을 선사하는 상황을 의미하는 관용구로 쓰이게 된다.

tvN 토일드라마 '판도라'(크리에이터 김순옥, 연출 최영훈, 극본 현지민)의 주인공 홍태라(이지아) 역시 마찬가지다. 태라의 삶은 남부러울 것이 없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것은 물론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편과 토끼 같은 딸과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특히 IT 기업 대표인 남편 표재현(이상윤)은 차기 대권주자로 떠오르고 있다. 신에게 선물 받은 것처럼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런 태라에게가 열지 말아야 할 상자는 15년전 사고 이전의 기억이다.



판도라에게 상자를 절대 열지 말라고 경고했던 제우스는 사실 판도라가 상자를 열어주기를 의도했다. 태라의 상자가 열리길 바랐던 사람은 친언니 유라(한수연)다. 사실 유라는 태라의 친언니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의뢰를 받고 태라를 동생으로 거둔 것이다.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이 조금씩 흘러나오던 홍태라의 상자는 결국 완벽히 열리게 된다. 태라는 자신의 본명이 오영이었으며 절친 고해수의 아버지이자 대통령 취임식에 나선 고태선을 저격한 인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동시에 자신을 킬러로 길러낸 조직도 자신의 존재를 알아채고 처치하려 한다. 믿었던 언니는 자신의 과거를 폭로하고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속사정을 말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며 신에게 받았던 선물 같은 삶에 균열이 나기 시작한다. 점차 기억이 돌아오는 태라는 자신의 삶에 균열을 내려는 자들로부터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판도라'는 김순옥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사실 극본을 집필한 작가는 현지민 작가다. 김순옥 작가의 작품 '언니는 살아있다!' '황후의 품격' '펜트하우스 시리즈'를 보조 집필한 현지민 작가는 이번 작품이 입봉작이다. 김순옥 작가는 크리에이터로 참여했다. 드라마를 한 편의 그림이라고 생각한다면 김순옥 작가 특유의 화풍은 곳곳에서 느껴진다. 그림의 물감이 되는 소재 역시 그러하다. 기억상실과 복수, 얽히고 설킨 치정 등의 소재는 김순옥 작가가 주로 다뤘던 내용들이다.

/사진=tvN/사진=tvN
현지민 작가는 여기에 기억을 잃은 킬러라는 물감을 추가했다. 나름의 변주를 준 셈이지만 묘하게 이질감과 기시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김순옥이라는 장르와 기억을 잃은 킬러라는 소재는 단박에 와닿지 않는다. 오히려 킬러라는 소재가 다른 재료마저 잡아먹는 느낌을 줄 때가 있다. 동시에 김순옥 사단의 작품이 아닌 곳으로 눈을 돌리면 이는 이미 할리우드 수많은 액션물에서 많이 써먹은 설정이기도 하다. 같은 물감이라도 어떻게 그려내느냐에 따라 새롭게 와닿을 수 있지만 아직까지 '판도라'는 기존의 방식을 답습하는 모양새다.


캔버스의 정중앙에 그려질 이지아 역시 마찬가지다. 이지아는 '판도라'에서 두 가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모두 낯선 모습은 아니다. '펜트하우스'에서 보여준 우아한 사모님의 모습과 '태왕사신기'·'아테나'에서 보여준 몸을 아끼지 않는 액션 연기가 공존한다. 이지아라는 배우의 매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장치지만 두 캐릭터를 묶어주는 키워드가 부족해 아직은 흡인력이 부족하다.

시청자들 역시 '판도라'라는 그림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듯 보인다. 판도라는 첫주 각각 4.9%와 5.7%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전작 '일타 스캔들'이 17%의 시청률을 기록한 것을 고려하면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다. '일타 스캔들' 역시 4%대의 시청률로 시작해 3배 이상의 상승폭을 기록했기 때문에 '판도라' 역시 비슷한 결과를 이끌어 낼 수도 있다. 다만, 아직은 '퀀텀 점프'를 이끌어 낼 상승요인을 찾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구도를 잡고 밑그림을 그리는 단계다. 본격적인 채색이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결과물을 예단할 수는 없다. 밑그림이 빈약하더라도 상상 이상의 결과물을 보여주는 경우는 자주 봐온 일이다. '판도라'가 그려낼 작품이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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