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미술품 약탈 사태의 '애국자'와 '부역자'[PADO]

머니투데이 김수빈 PADO 매니징 에디터 2023.02.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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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2월 20일은 2차 세계대전 이래 유럽에서 벌어진 최대 규모의 전쟁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1주년입니다. PADO는 정치, 외교, 군사, 경제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 전쟁의 이면을 들춰보는 기사를 소개합니다. 이번에는 러시아가 점령지에서 약탈한 우크라이나 미술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포탄이 떨어지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와중에 미술품이 뭐 그리 중요하냐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화재 또한 국민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요소이지요. 자국의 미술품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우크라이나 국민이 있는가 하면 점령군에게 숨겨진 미술품의 위치를 귀띔해주는 '부역자'도 있습니다. 8개월 정도 러시아의 점령을 받았다가 수복된 헤르손 지역에서는 이런 부역자들을 색출하는 작업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민한 독자라면 한국 현대사의 그늘에도 비슷한 사례가 많았음을 떠올릴 겁니다. 전쟁은 군대가 격돌하는 전선 뿐만 아니라 평범한 국민의 삶 속에서도 벌어진다는 진리를 엿볼 수 있는 애틀랜틱(Atlantic)의 1월 21일자 기사를 요약 소개합니다.

(헤르손 AFP=뉴스1) 김성식 기자 =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계속되는 가운데 25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의 한 성당에서 성탄 미사에 참석한 노인이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며 기도하고 있다. 2022.12.25.   ⓒ AFP=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헤르손 AFP=뉴스1) 김성식 기자 =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계속되는 가운데 25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의 한 성당에서 성탄 미사에 참석한 노인이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며 기도하고 있다. 2022.12.25. ⓒ AFP=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우크라이나 남부의 도시 헤르손을 영원히 점령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러시아 군대는 점령한 지 8개월이 된 작년 11월, 헤르손을 포기하고 드네프르강을 넘어 남쪽과 동쪽으로 철수해버렸다. 러시아군이 헤르손의 박물관에서 약탈한 대량의 문화재도 함께였다.

헤르손의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미술품이 인근의 크름반도로 반출됐다. 러시아가 2014년 우크라이나로부터 무력으로 병합한 곳이다. 크름 지역의 한 미술관 관장은 약탈 미술품이 자신의 미술관에 "보관"돼 있다고 자유유럽방송(RFE)에 말했다. 하지만 헤르손의 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스키타이, 사르마트, 고트, 그리스(모두 러시아 제국 등장 수백 년 전 흑해와 아조프해 부근에 살던 민족이다)의 고대 공예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헤르손 과학도서관의 귀중한 장서 수백 권도 행방이 묘연하다.



우크라이나의 소장품 관리자와 큐레이터들은 사라진 소장품의 행방과 그 손실 규모를 파악 중이다. 이들은 러시아의 미술품 약탈을 나치 독일의 만행에 비견했다. 나치 독일도 1941~1944년, 3년 가량 우크라이나를 점령하면서 헤르손의 박물관을 약탈했었다. 이들은 오히려 이번 러시아의 약탈을 더 악랄하게 여겼는데 특히 배신감 때문이었다. 러시아인에 대한 배신감도 물론이지만 더욱 큰 배신감은 밀고자, 부역자가 된 동료들 때문이었다. "러시아인은 자신들이 우리의 형제라고 말했어요." 내가 수도 키이우에서 인터뷰했던 알리나 도첸코(Alina Dotsenko)의 이야기다. 그는 오랫동안 헤르손 미술관 관장으로 일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 것은 "같은 동료들이 우리 미술관 약탈을 도왔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반대로 적의 약탈 계획을 막고 소장품과 문헌을 지키려 애쓴 이들의 용감한 저항도 있긴 했다.

그러나 헤르손이 해방된 직후 11월 11일, 도첸코가 약탈당한 수장고에 들어갔을 때 그는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1만4000점이 넘는 소장품 중 적어도 1만 점이 사라졌더군요." 그는 말했다.



작년 3월 초 러시아 침략군이 헤르손을 점령한 직후에는 도첸코 관장과 임무에 충실한 직원 한나 스크리프카(Hanna Skrypka)가 꾀를 내 소장품을 지킬 수 있었다. 점령군에게 미술관 리노베이션 공사로 소장품이 모두 외부로 반출된 상태라고 둘러댔다. 미술관은 건설용 가설물에 둘러싸인 상태였지만 사실 미술품은 미술관 지하실에 보관중이었다. 소장품 중 오래된 성화(聖畵)에 사용된 값비싼 금, 은 액자는 아예 금고 안에 넣어 보관하고 있었고, 스크리프카가 그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핑계가 3개월 간 먹혀들자 도첸코, 스키르프카와 같은 생각을 가진 동료들은 러시아가 자신들의 꾀를 영원히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배신자가 나타났다. 전직 미술관 직원 둘이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KGB의 후신 --편집자주)에 미술품이 지금도 건물 안에 있다고 밀고했다고 도첸코는 설명했다.

(헤르손 로이터=뉴스1) 정윤미 기자 = 13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 중심부에서 한 남성이 우크라이나 깃발을 흔들고 있다. 그는 지난 2월24일 러시아 침공 이래 점령 당했던 헤르손 해방을 기념하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2022.11.13  ⓒ 로이터=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헤르손 로이터=뉴스1) 정윤미 기자 = 13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 중심부에서 한 남성이 우크라이나 깃발을 흔들고 있다. 그는 지난 2월24일 러시아 침공 이래 점령 당했던 헤르손 해방을 기념하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2022.11.13 ⓒ 로이터=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10월 말 우크라이나군이 헤르손을 되찾기 위해 움직이자, 러시아의 조직적인 약탈이 시작됐다고 스크리프카는 말했다. 러시아가 임명한 신임 데샤토바 관장은 스크리프카에게 11월 1일 출근하라고 했다. 미술관에 들어선 순간, 그는 후회했다. 박물관은 러시아인으로 가득했다. 군복 차림의 무장한 체첸인 두 명은 자신들이 FSB 요원이라고 했다. "정말 많은 사람을 죽였을 것 같은 모습이었어요." 스크리프카는 말했다. "그들이 노려보자 살갗이 얼어붙는 느낌이었습니다."


이후 48시간 동안 스크리프카는 사실상 감금된 상태였다. 데샤토바는 스크리프카에게 약탈하는 미술품의 목록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자신을 러시아 문화부 관계자라 소개한 모스크바에서 온 인물에게 줄 것이었다. "심지어 미술관의 부역자들도 그에게 8000점 정도에서 멈춰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더 많은 미술품을 원했어요." 스크리프카의 말이다. "충분히 가져가지 않으면 윗선에서 화를 낼 거라고 하더군요." 약탈꾼들은 금과 은으로 장식된 성화 액자가 든 금고를 열도록 스크리프카를 강요한 후 금고를 털었다. 그는 약탈을 막지 못했으니 적어도 목격자가 돼야겠다고 다짐했다. "제 눈과 귀로 모든 걸 기억하겠다고 결심했죠."

헤르손 미술관에 따르면 전쟁 전 근무하던 13명의 직원들 중 7명이 러시아 점령자들의 약탈을 도왔다고 한다. "이 일곱 명의 직원 중 여섯은 헤르손을 떠나 크름으로 갔고 나머지 하나는 아직도 헤르손에 있는 걸로 확인됐습니다." 도첸코 관장의 말이다. 러시아가 임명한 관장인 데샤토바는 퇴각하는 러시아군과 함께 헤르손을 떠났고, 현재 우크라이나 경찰이 수사중인 피의자 명단에 올라있다.

헤르손 문화유산의 유지와 배신에 대한 이야기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침략군으로부터 수복한 지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우화라 할 수 있다. 이미 작년 8월 중반에 우크라이나 경찰은 약 1200건의 부역 행위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이라고 발표했다. 한편 수십 년 전에도 헤르손의 큐레이터들이 했던 미술관 소장품 되찾기 작업이 새로이 시작됐다.

"전 세계에서 지지와 성원을 받고 있습니다. 저희는 희망을 갖고 있어요." 곤차로바 관장의 말이다. "우리 소장품은 다시 늘어날 겁니다. 모든 부역자와 약탈자가 떠나고 나니 여기가 더 깨끗해진 것도 같고요."



이 글은 국제시사·문예 버티컬 PADO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미술품 약탈 이야기'를 요약한 것입니다. PADO는 통찰과 깊이가 담긴 롱리드(long read) 스토리와 문예 작품으로 우리 사회의 창조적 기풍을 자극하고, 독자 여러분이 급변하는 세상의 파도에 올라타도록 돕는 작은 선물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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