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간첩은 호랑이의 곶감이 아니다

머니투데이 양영권 사회부장 2023.01.2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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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P(일반전초) 부대에 배속돼 군생활을 하던 때의 얘기다. 남방한계선 철책 경계를 담당하는 관측소(OP)가 발칵 뒤집혔다. 부대원에게 들은 얘기로는 3중으로 된 Y자 형태 철책 위에 보따리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아침 근무에 나선 초병이 발견했다는 것이다. 누군가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다가 두고 간 것인지, 월북한 흔적인지 파악 중이라고 했다. 어느 쪽이든 문제였다. 나는 곧 다른 GP(전방초소)로 근무지를 옮겼고, 남의 부대에서 일어난 일을 곧 잊었다. 그 당시 철책 월북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안 것은 10여년이 흐르고 뒤늦은 언론 보도를 통해서였다.

비슷한 시기 근무지와 가까운 곳에서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터졌다. 무장공비 13명이 국군에 의해 사살됐다. 우리도 현역 군인 10명과 예비군 1명, 민간인 4명이 사망하는 피해가 있었다. 택시기사가 강원 강릉시 안인진리 해안에서 고장나 좌초된 북한 잠수정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지나칠 사건이었다.



이듬해 2월에는 김정일의 처조카로, 탈북해 남한에 살고 있던 이한영 씨가 2인조 남성에게 살해됐다. 짐작만 할 뿐 누구의 소행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7년여가 흘러 법원은 이씨의 아내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리며 "여러 증거와 정황에 비춰 이씨는 남파간첩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간첩이 어디든 있을 수 있고, 언제든 우리를 위협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은 1990년대 중반 이같은 일련의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결과다. 남북 관계에 부침이 있었지만 대치 상황은 그대로다. 그때보다 국경은 더 열려 있고 통신수단이나 여론조작 수단은 더 다양해졌다. 지난해 말부터 이뤄지고 있는 일련의 압수수색으로 알려지게 된 간첩단 지하조직 수사는 결코 공안당국발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아니다. 누군가는 간첩이 옛날이야기 속 호랑이를 겁먹게 하는 '곶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경험적으로 증명된 존재인 것임은 분명하다.



국가정보원이 내년 1월 대공수사권을 경찰에 이양하는 상황에서 방첩 기능이 공백을 맞게 될 것이라는 우려는 합리적이다. 대공수사는 긴 호흡으로 보안을 철저히 지켜가며 이뤄져야 할 때가 많다. 층층이 통제를 받는 경찰이 그에 적합한 조직은 아니다.

국정원 개혁의 이유로 제시된 인권탄압과 정치개입은 조직이 '사람에 충성한' 결과다. 국정원을 말할 때 항상 과거 자행한 무리하고 비인권적인 수사가 논란이 된다. 한편으로 진보정부의 국정원은 수사 단서를 확보하고도 남북 해빙무드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수사를 지연시켰다는 의혹을 받는다. 조직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국정원을 이용하는 정치권력이 문제라는 것을 방증한다. 대공수사권 자체가 문제라면 그것이 이관되는 경찰에도 똑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더 소개한다. 이한영씨 유족에게 국가배상 판결이 내려진 2004년 12월 어느날 이씨의 아내 김모씨가 법원 기자실에서 소회를 밝히는 기자회견을 했다. 법원 취재기자였던 나는 회한이 가득한 얼굴로 기자실 소파에 앉은 그에게 냉수가 든 종이컵을 건넸다. 그런 나에게 김씨는 일어서 허리를 직각으로 굽히며 연신 "고맙다"고 했다. 물 한잔 건넨 데 따른 반응치고는 과하다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가 그동안 얼마나 숨죽이며 국가의 보호 없이 괴롭고 쓸쓸한 나날을 보냈는지 가늠할 수 있는 강렬한 순간이었다. 과거의 공과를 되돌아볼 것은 되돌아보되, 실존하는 위협세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지. 오직 그 관점에서 대공수사권 이전은 다시 검토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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