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무실화된 법안비용추계제도

머니투데이 박선춘 씨지인사이드 대표 2023.01.11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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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춘의 여의도 빅데이터]위원회 제안 법률안 비용추계서 첨부율 ‘0’

▲박선춘 씨지인사이드 대표▲박선춘 씨지인사이드 대표


638조7000억원. 내년도 예산안 규모다. 10년 전인 2013년 예산 342조원(총지출 기준) 대비 2배에 가까운 규모다. ‘숨만 쉬어도 재정지출은 증가한다’라는 속설처럼, 국가채무는 2017년 660.2조원에서 2023년 1,134.4조원으로 474.2조원(71.8%)이나 늘었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인구구조 변화로 인해 재정지출 증가속도는 앞으로도 가파를 것이고, 하락한 성장 잠재력은 당분간 회복되기 어려울 전망이다.



이제라도 재정지출을 합리적으로 통제해야 한다. 법과 제도가 없는 건 아니다. 2005년부터 도입된 ‘법안비용추계제도’가 그것이다. 국회법 제79조의2에 따르면, “의원이 예산상 또는 기금상의 조치를 수반하는 의안을 발의하는 경우에는 예상되는 비용에 관한 추계서 또는 추계요구서를 함께 제출하여야 한다.” 개별 법안마다 소요되는 재정 규모와 필요성, 타당성을 심사과정에서 철저히 따져 국민의 혈세가 낭비되는 것을 막으라는 취지다.

현실은 실망스럽다. 유명무실화됐다. 통계로 살펴보자. 2015년 비용추계서 제출 비율은 76.5%였다. 비용추계서를 첨부하지 않은 법안이 10건 중 7건을 넘는다. 법을 위반한 수치는 2018년 들어 80.9%로 증가했고, 2019년에는 84.5%, 2020년에는 91.7%로 증가했다. 법안비용추계제도가 유명무실화를 넘어 사문화됐다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더욱 심각한 것은 위원회가 제안하는 ‘대안’이다. 여러 건의 법률을 병합해 심사하는 과정에서 조율된 내용을 위원회가 하나의 법안으로 담은 것이 ‘대안’인데, ‘대안’ 중 법안비용추계서가 첨부된 사례는 단 1건도 없다. 21대 국회에서 본회의를 통과한 1,734건의 법안 중 44.98%인 780건이 대안이었다. 법안비용추계제도가 유명무실화된 원인이 과도한 입법경쟁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망가진 법안비용추계제도의 정상화는 요원하다. 지난 2021년 개정 국회법 때문이다. 의원이 법안을 발의할 때 비용추계서를 첨부하도록 의무화하고, 첨부하지 않을 경우 미첨부사유서라도 첨부하도록 규정했던 것을 ‘비용추계요구서’라는 기상천외한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법안을 발의할 때 예산정책처로 하여금 비용추계서를 첨부하라고 요구하기만 하면 비용추계서를 첨부하지 않아도 된다. 예산정책처는 상임위 심사 전에 비용추계서를 첨부해야 하지만 단 1건도 첨부하지 않고 있다. 의원들을 지원해야 할 국회 기관마저 비용추계제도를 무력화하는 데 동참한 셈이다.


이젠 진지하게 논의할 때다. 비용추계서가 첨부된 법안만 심사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 속도보다 제대로 심사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국회에게 법안심사를 재촉하지 않아야 한다. 법안심사가 지체되더라도 보다 신중하게, 면밀하게 법안을 심사하라고 요구할 때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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