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70세 안 되셨어요? 그럼 일 더 하셔야죠"

머니투데이 이상배 경제부장 2023.01.10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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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노인노인


#1. 1347년 이탈리아 항구도시 제노바에 흑사병(페스트)이 상륙했다. 역병은 순식간에 유럽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 후 50년 동안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흑사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몹쓸 역병은 300년 가까이 유럽을 괴롭혔다. 15세기엔 약 10년 주기로 흑사병이 유럽 거의 모든 지역을 휩쓸었다. 대도시 피렌체도 예외가 아니었다. 흑사병 때문에 피렌체의 인구는 절반으로 줄었다. 물론 흑사병을 피해 시골로 피난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흑사병이 사람의 목숨만 앗아간 건 아니었다. 팬데믹(대유행)은 유럽의 중세 질서를 무너뜨렸다. 교회는 권위를 잃었고, 봉건제는 서서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인구 급감으로 일할 사람이 부족해지자 농민은 귀하신 몸이 됐다. 지주에게 주는 소작료가 뚝 떨어졌다. 반대로 소작료 수입이 줄어든 지주들은 땅값 폭락까지 이중고를 겪었다. 친척들이 흑사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갑자기 재산을 물려받은 농민들은 싼 값에 땅을 사들여 자영농이 됐다.



#2. 17세기엔 영국이 흑사병의 직격탄을 맞았다. 역병으로 런던, 맨체스터 등 도시의 근로자 수가 급감하자 영국의 임금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영국 출신의 경제사학자인 니얼 퍼거슨 미국 스탠포드대 후버연구소 선임연구원에 따르면 18세기 중반 런던 근로자의 실질임금은 프랑스 파리의 2배, 이탈리아 밀라노의 4배에 달했다.

인건비 부담이 커지자 영국에선 자연스레 사람의 힘을 대신할 증기기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마침 영국엔 질 좋은 석탄이 풍부했다. 이것이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된 배경이다. 잔혹한 역병이 인류의 발전을 추동한 아이러니다.


흑사병은 사람들의 가치관도 바꿔놨다. 더 이상 죽음은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등 귀족들은 천국에 가기 위해 재산을 아낌없이 교회에 헌납하고 예술가들에게 일감을 맡겼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문예부흥, 이른바 '르네상스'다.

여기에 흑사병에 따른 인구 감소도 한몫했다. 높은 인건비와 갑작스러운 상속은 사람들에게 예술을 즐길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안겼다. 비극의 또 다른 역설이다.

#3.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을 몰고 왔다고 인구 감소를 축복으로 볼 순 없다. 인구가 줄어드는 과정이 재앙에 가깝다는 점에서다.

지금 우리나라처럼 인구 감소가 출산율 저하에 따른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인구가 급감하는 국면에서 생산인구 1명당 부양해야 할 노인의 수가 급증하기 때문이다. 전체 인구 수가 아니라 연령대별 인구 구조가 문제인 셈이다.

통계청과 KDI(한국개발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노년부양비(생산인구 100명당 65세 이상 인구의 비율)는 지난해 24.6명에서 2070년 100.6명으로 불어날 전망이다. 생산인구 1명이 노인 1명씩을 먹여 살린다는 뜻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치다. 태어날 자식에게 이런 부담을 안기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겠나. 이런 상황에서 출산을 장려한다고 효과가 있을까.

가장 활발한 생산인구인 청년의 비중이 줄면 사회는 활력을 잃는다. 1980년대 글로벌 경제호황은 청년층의 높은 인구 비중과 무관치 않았다. 역사상 1978∼1987년 만큼 세계적으로 25∼34세 인구의 비중이 높았던 적은 없다.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에선 이 비중이 20%를 넘겼고, 미국에선 17%에 달했다.

생산인구의 급감은 기업 입장에선 시한부 선고와 다를 바 없다. 일 할 사람이 부족해지고, 물건을 사줄 사람도 줄어든다는 뜻이니까. 먼 이야기가 아니다. 조선업 등 일부 업종에선 이미 구인난이 시작됐다. 외국인 근로자가 없으면 안 돌아가는 공장이 수두룩하다.

출산이나 이민을 늘리지 않는 한 부족한 생산인구를 채울 방법은 정년 연장 뿐이다. 일본처럼 70세 정도까지 정년을 점진적으로 미루면 어떨까. 우선 취업 기피 업종에 한정한다면 청년들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아직 70세 안 되셨어요? 그럼 일 더 하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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