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가 필요한 이들을 위한 대리처방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머니투데이 조이음(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2.12.07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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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보면 계속 보게 만드는 김설현 임시완이 선사하는 힐링

사진제공=KT스튜디오지니사진제공=KT스튜디오지니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리는 이들이라면, 치열한 일상을 버텨낸 이들이라면, 아니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꿈꿔 봤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상. 하지만 부모님의 포근한 품이 아니고서야 숨만 쉬어도 돈이 초 단위로 필요한 게 삶이기에 금수저가 아니고서야, 혹은 두둑한 잔고를 손에 쥔 게 아니고서야 이 꿈을 현실로 이루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도 일하지 않는 주인공도 흔치 않다. 간혹 직업이 없다면 역시 대단한 배경을 등에 업었거나, 취업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취업 준비생이 대부분이다.

때문에 지난달 막을 올린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극본 홍문표 이윤정, 연출 이윤정 홍문표, 이하 ‘아하아’)는 제목을 접한 순간부터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라는 바람은 주인공 중 누구의 것일지, 그 바람이 제대로 이뤄지긴 할지 말이다.



‘아하아’는 인생 파업을 선언한 자발적 백수 여름(김설현)과 삶이 물음표인 도서관 사서 대범(임시완)의 쉼표 찾기 프로젝트를 그리는 드라마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복잡한 도시를 떠나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찾아간 낯선 곳에서 비로소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는다.

사진제공=KT스튜디오지니사진제공=KT스튜디오지니


첫 화에는 이여름의 고단하고 버거운 ‘서울 버티기’가 펼쳐진다. 출판사 4년 차 직원인 여름은 부당한 대우도 참고 버티는 인물이다. 엄마의 사소한 안부 전화에 불쑥 치미는 짜증으로 잠시나마 속을 내보이지만, 엄마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나자 제 감정은 갈무리한다. 오래 만난 남자친구에게 하는 가벼운 하소연이 여름의 유일한 분출 방법이지만, 그는 이런 여름에게 질린 지 오래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부고 소식에 여름은 허망함을 느끼고, 장례를 치르고 돌아왔건만 세상은 변함없이 바쁘게만 돌아간다. 여름 또한 일상의 쳇바퀴를 다시 굴리던 중 사소한 사고로 쳇바퀴에서 튕겨 나간다. 그제야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고 쫓기듯 살고 있던 저를 인지한 여름은 “나 회사 안가”라며 다시는 쳇바퀴에 올라서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사실 원작 웹툰을 접하지 않은 시청자라면 첫 화에 담긴 여름의 이야기에 고개를 내저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어디까지 참을 수 있나 보자’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 봐’라고 시험이라도 하듯 여름을 현실의 끝까지 내모는데, 부당한 일을 당했음에도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한 채 참기만 하는 여름의 성격까지 더해져 답답함을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앞으로 펼쳐질 여름의 ‘인생 파업’ 선언을 위한 빌드업(최종적인 결과를 위해 단계를 쌓아가는 과정)이다. 결국 첫 화 말미 여름은 퇴사 선언과 함께 애쓰며 버텨온 서울 생활을 정리한다. “남의 눈치 신경 쓰지 말고, 내 뜻대로 살아보자”며 단출한 짐만을 들고 발길 닿는 대로 떠난다.

여름의 인생 2막과 함께 비로소 힐링 드라마가 펼쳐진다. 여름이 도착한 곳은 깨끗하고 반짝이는 바다가 반기는, 때로는 아이들이 뛰놀기도 하는 도서관이 있는 안곡 마을이다. 모아둔 돈도 얼마 없는 여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최대한 버티기 위해 오랜 시간 빈 상태(심지어 사람이 죽어 나갔다는)로 방치된 당구장을 월 5만 원에 1년 살기로 계약하고, 제 하루 생활비를 1만 원으로 타협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이곳에 당도한 여름에게 정해진 일과는 당연하게도 없다. 때로는 도서관을 찾아 책을 읽고, 도서관 사서로 만나 도서관을 오가며 익숙해진 대범과 여러 소동을 통해 가까워진다. 첫 만남엔 얼굴을 붉혔으나 어느새 절친한 언니 동생이 된 봄(신은수)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거나, 측은지심으로 두 달 치 생활비에 버금가는 돈을 지불하고 거둬들인 강아지 겨울이와 함께한다. 배가 고프면 라면을 끓여 먹거나 식당에서 반주를 곁들인 순댓국을 먹기도 한다. 그러다 술에 취해 실수라도 하면 온 동네에 순식간에 소문이 난다는 취약점이 있지만, 그 덕분에 봄이 끓여준 북엇국으로 속을 풀기도 한다. 서울에서 온 여름을 온갖 텃세로 내쫓으려던 마을 사람들은 어느새 여름을 따뜻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여름 역시 이를 느낀다.


사진제공=KT스튜디오지니사진제공=KT스튜디오지니
장르와 캐릭터를 넘나들며 연기 경험을 쌓아온 김설현은 전작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눈길을 끈다. 그간 사건 중심의 드라마에서 할 말 다 하는 씩씩한 캐릭터로 분한 김설현과 만났다면 ‘아하아’ 속 그는 낯설 정도로 정 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최소한의 옷만 챙겨 떠난 여름을 연기하기 위해 민낯을 고수하며 평소 입던 옷 몇 벌로 촬영에 임했다는 김설현의 연기는 마치 살아 숨 쉬는 이여름 자체로 다가온다. 술 취한 연기는 화면 밖으로 알코올 향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키는데, 만취해 대범을 향해 “왜 내 눈앞에 나타나”를 열창할 땐 사랑스럽게도 느껴진다. 임시완은 전작 캐릭터와 180도 다른 안대범 역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무엇보다 이른 아침 일어나 해변가를 달리고 제 말을 하기보다는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게 익숙한 모습 등에서 JTBC ‘런온’ 속 기선겸과 비슷한 결로 분류되지만, 다수의 작품에서 그러했듯 안정적이고 섬세한 연기력으로 든든하게 작품을 이끈다. 두 배우 외에도 신은수, 박예영을 비롯해 단독 포스터까지 존재하는 개 배우 겨울이 등 연기력 든든한 배우들이 마음 편안해지고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가득 채운다.

12부작 중 이제 막 절반의 이야기가 방송된 ‘아하아’. 원작을 끝까지 보지 않아 결말이 어떻게 났는지 모르고, 드라마의 결말 또한 가늠할 수 없다. 다만 여름도 대범도 안곡 마을에서 보낸 시간들이, 이 쉼표가 ‘무언가’를 해낼 자양분으로 삼지 않을까 짐작만 해 본다.

열심히 살다 보면 당연한 수순처럼 찾아오는 번아웃. 이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은 이유에 쉼표를 찍는 것이라는 걸 안다. 다만 쉼표를 찍기까지 수많은 상황들을 고심해야 하기에, 그마저도 쉽지 않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잠시라도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날, 하지만 쉽게 떠날 수 없는 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라는 꿈을 대리 실현해 줄 ‘아하아’를 추천한다. 적어도 팍팍한 일상 속 잠시나마 달콤함을 느낄 수 있는 사탕 한 알의 힘은 얻을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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