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이준익이 던진 메시지가 기억속에 각인될 '욘더'

머니투데이 정유미(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2.10.26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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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적 설정을 현실감있게 느끼게 해줄 배우들의 열연 압권

사진제공=티빙사진제공=티빙


‘당신의 죽음을 멋지게 디자인할 수 있습니다.’

이준익 감독의 첫 드라마 연출작으로 기대를 모은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욘더’가 지난 10월 14일과 21일 두 차례에 걸쳐 공개됐다. 죽은 사람의 기억을 업로드하여 삶을 지속시킨다는 독특한 세계관에 주연배우 신하균과 한지민을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 근미래를 이질감 없이 담아낸 영상미와 죽음에 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지며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SF 원작을 오랫동안 품었던 거장의 고심이 볼거리와 생각거리로 가득 찬 웰메이드 SF 드라마를 낳았다. OTT 천하에서 오래 기억할 만한 드라마의 등장이 유독 반갑다.

안락사법이 통과된 2032년, 기자 재현(신하균)은 심장 암 시한부 선고를 받고 투병 중이던 아내 이후(한지민)를 안락사로 떠나보낸다. 그렇게 아내를 잃고 슬픔에 빠진 재현에게 죽은 이후가 보낸 이메일 영상이 도착해 혼란스럽게 만든다. 재현은 이후가 생전의 기억을 바이앤바이라는 회사에 저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친한 동생이자 프로그래머인 프로박(배유람)과 보건국 장기수급팀 팀장 조은(주보비)의 도움을 받아 바이앤바이와 ‘욘더’의 정체를 파헤친다.



‘욘더’는 김장환 작가의 판타지 소설 ‘굿바이, 욘더’(2011)가 원작이다. 제목 ‘욘더(YONDER)’는 영어로 ‘저기, 저편’이라는 뜻으로 작품 속에서는 죽은 자의 기억으로 구성된 가상공간, 사이버스페이스 천국을 말한다. 10년 전부터 원작 소설을 영상으로 옮기는 작업을 준비해온 이준익 감독은 욘더를 둘러싼 복잡한 이야기를 간결하게 만들고, 캐릭터들도 정비했다. 먼 미래의 사이테크 사회를 배경으로 한 원작이 사이버틱한 색채가 강했다면, 드라마는 근미래로 배경으로 변경해 좀 더 현실적인 분위기를 갖는다. 프로그래머 박과 조은을 조력자 캐릭터로 만들고, 이후를 욘더로 이끈 인물 세이렌(이정은)을 처음부터 부각한 점도 원작과 차이점이다.

사진제공=티빙사진제공=티빙


OTT 콘텐츠 제작이 활발해지면서 한국에선 아직 개척 장르에 속하는 SF에 대한 시도가 이어지는 추세다. 기존의 한국 SF 드라마, 영화가 할리우드를 비롯한 해외 SF 작품들과 유사한 모양새를 취하면서 진부하다는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욘더’는 이러한 평가에서 벗어난다. 원작을 그대로 옮기기보다 본질적인 메시지에 집중한 연출이 돋보인다. SF 세계를 구현하는 데에만 치우치지 않고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배경과 소품을 절제 있게 사용해 오히려 SF적인 터치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만들려면 연출자의 과감한 결단력이 필요하다. 첫 SF, 첫 OTT 연출이라는 수식이 붙지 않더라도 ‘욘더’는 이준익 감독의 뚝심 있는 연출이 또 한 번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SF 드라마의 레퍼런스들을 의식하지 않고 만든 연출의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왕의 남자’(2005), ‘사도’(2015), ‘동주’(2016). ‘자산어보’(2021) 등 시대극에서 탁월한 연출을 인정받았지만, 시대와 장르 구분 없이 그의 작품에는 인간의 삶에 대한 진심 어린 고민과 치열한 통찰이 담겨 있다.

플랫폼이 영화에서 드라마로 달라졌을 뿐이지 ‘욘더’도 마찬가지다. 이준익 감독은 인간의 삶뿐 아니라 죽음, 행복에 관한 질문을 한가득 띄우고 그에 대한 답을 차근히 풀어간다. 세계적으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안락사, 존엄사 문제부터 영원한 삶이 과연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학 기술에 의존해서라도 기억을 붙들려 하는 등장인물들을 빌어 불멸에 집착하는 인간의 이기심을 지적한다.


사진제공=티빙사진제공=티빙
이준익 감독 특유의 연출을 OTT에서 몰입도 있게 만끽할 수 있다는 점도 ‘욘더’의 미덕이다. 원작의 철학적인 대사들을 인상적으로 살리면서,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등 문학을 인용해 따뜻한 울림을 선사한다. 진지한 분위기로 진행되지만 이준익 감독 작품 특유의 소박한 유머가 곳곳에서 숨통을 틔워주고,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부터 시선을 사로잡는 빼어난 촬영, 드라마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은 OST의 효과까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욘더’로 이준익 감독과 첫 호흡을 맞춘 신하균과 한지민은 한층 깊어진 연기로 기대에 부응한다. 1인극에 가깝게 극을 이끄는 신하균의 밀도 높은 연기와 한지민의 애절한 감정 연기는 자칫 허황된 설정으로 보일 수 있는 스토리를 의심할 여지 없이 납득하게 만든다. ‘자산어보’의 시골 아낙에서 ‘욘더’의 세이렌으로 분한 이정은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차분한 연기 톤으로 미스터리한 캐릭터에 힘을 싣는다. ‘왕의 남자’ ‘즐거운 인생’(2007), ‘님은 먼곳에’(2008) 등 이준익 감독의 작품에서 주요 역할을 맡아온 정진영은 닥터케이 역을 맡아 드라마의 주제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다. 웬만한 실력을 갖춘 배우들이 아니고선 SF 장르에서 흔들림 없이 연기하기가 만만치 않은데, 자기중심을 단단히 붙든 배우들 덕분에 드라마가 더욱 견고해졌다.

6부작 ‘욘더’는 한 회당 30분~40분 내의 러닝타임이어서 부담 없이 시청할 수 있다. 1화부터 마지막까지 한달음에 보기에도 무리 없다. 이왕이면 정주행을 추천한다. 드라마의 매끄러운 곡선 커브를 느끼면서 영화처럼 즐길 수 있다. 모처럼 한국영화의 거장이 자극적인 소재로 경쟁하는 OTT계에 제대로 된 자극을 주었다. 수많은 콘텐츠가 휘발성으로 소비되는 시장에서 ‘욘더’는 기억에 남을 만한 콘텐츠의 조건을 생각하게끔 한다. 곁눈질하지 않고 믿음에 부응하는 드라마가 선택받는다. 작품마다 묵직한 주제를 정공법으로 돌파하는 이준익 감독의 다음 도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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