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빼앗은 조카, 10억 갈취한 아들…친족상도례 '면죄부'

머니투데이 이세연 기자 2022.10.1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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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리포트-가족이란 이름의 면죄부, 69년 낡은 친족상도례]②

집 빼앗은 조카, 10억 갈취한 아들…친족상도례 '면죄부'


"이모, 밥 먹으러 가요"

치매 노인 이순희씨(80·가명)는 2020년 10월 외조카와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자신 소유의 아파트를 뺐겼다. 조카는 몇 달 전 갑작스레 이씨를 찾아왔다. 30년 전 유일한 가족인 아들과 연락이 두절된 뒤 처음 닿은 혈육의 연락이었다. 조카는 치매가 있는 이씨를 보호해주겠다며 통장과 신분증, 인감도장 등을 자신이 관리하겠다고 했다. 이씨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조카는 막무가내였다.

이씨와 함께 외출한 조카는 부동산 거래를 했다. 기초생활수급권자를 만들어주겠다며 이씨가 살던 8000만원 상당의 아파트를 자신의 명의로 등기이전하고 6500만원에 팔아치웠다. 조카는 이씨의 통장에서 매달 100만~200만원을 출금했다. 이씨는 치매 탓에 인지·판단 능력이 떨어진 상태였다.



조카의 만행은 이웃의 신고로 드러났다. 노인보호전문기관은 노인에 대한 경제적 학대로 판단하고 조카에게 넘어간 아파트를 이씨에게 돌려줬다.

하지만 조카는 형사처벌을 피해갔다. 친족상도례 규정이 적용됐기 때문이다. 이씨가 조카를 직접 고소해야 하지만 명의를 변경할 때 동행했던 사실이 이씨에게 불리했다. 이씨의 치매 증상이 심해지면서 고소를 계속 진행하기도 어려웠다. 이씨는 치매 악화로 지난 5월 요양원에 입소했다.



가족간 경제적 착취에 친족상도례 규정이 적용되면서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피해자들은 믿고 의지하던 가족에 대한 신뢰를 잃고 경제적 손실을 입는다. 고통은 미래에도 이어진다. 시간이 지나 몰랐던 부채를 발견하거나 통장이 압류되는 등 삶이 망가진다. 가해자들은 가족이란 이름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처벌받지도 않는다. 형법 328조에서 정한 친족상도례가 면죄부다.

이씨 사건을 담당한 노인보호전문기관 관계자는 "이씨의 정신이 잠시 돌아왔을 때 조카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을 느꼈고 자신의 상황을 비관하며 무력감을 느끼더라"며 "형사 처벌을 진행하려고 했지만 친족상도례 때문에 직접 고소해야 했고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 고소를 포기했다"고 전했다.

아들이 10억여원을 훔쳐가고 빚까지 안겼지만 당하고만 있어야 했던 80대 노인도 있다. 치매 초기 환자인 김정숙씨는 남편을 일찍 잃고 홀로 1남 4녀의 5남매를 키웠다. 김씨는 치매 진단을 받고 요양병원에 입원하면서 평생 일군 재산 중 20억원을 아끼던 막내아들에게 증여했다.


막내아들은 잇단 사업 실패로 재산을 모두 잃자 김씨의 통장에 손을 댔다. 김씨의 은행 예금 10억원을 동의 없이 사용하고 김씨 명의의 아파트를 담보로 8000만원을 대출 받았다. 김씨는 병원비와 간병비를 내지 못하는 상황까지 몰렸지만 막내아들은 회피로 일관했다. 친족상도례로 잃은 돈을 되찾을 수도, 아들의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다.

집 빼앗은 조카, 10억 갈취한 아들…친족상도례 '면죄부'
치매 환자나 노인만 피해자가 되는 건 아니다. 중년 부모부터 아동까지 가족이 재산을 가로챘다는 상담 요청이 빗발치지만 대부분 친족상도례 때문에 고소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피해자를 두 번 울리는 셈이다. 대한법률구조공단에 접수된 친족상도례 관련 상담은 2017년 299건, 2018년 630건, 2019년 356건, 2020년 256건, 2021년 225건을 기록했다. 올 들어서는 지난달까지 214건이 집계됐다.

부모가 자식에게 빚을 지워도 처벌할 수 없다. A씨는 이혼한 전 남편이 아이 명의로 인터넷과 핸드폰을 개설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아이에게는 500만원의 채무가 생긴 상황이었다. A씨는 전남편을 사기로 고소하려 했지만 피해자가 전 남편의 직계가족인 아이라서 친족상도례가 적용됐다.

B씨는 딸이 자신의 통장에서 2억5000여만원을 빼내 남자친구에게 준 사실을 알게 됐다. B씨는 딸을 절도죄로 신고하려 했지만 친족상도례 때문에 처벌이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현장에서는 친족상도례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목소리가 크다. 일부 변화도 있다. 국회가 지난해 장애인 학대 범죄에는 친족상도례를 적용하지 않도록 장애인복지법을 개정했고 올해 시행됐다.

고명균 한국장애인개발원 중앙장애아동·발달장애인지원센터장은 "장애인을 상대로 한 범죄에 대해서는 친족상도례가 적용되지는 않지만 여전히 노인 등 취약계층을 향한 가족의 경제 착취는 발생하고 있다"며 "법망을 피한 착취가 계속될 수밖에 없는 만큼 현실에 맞게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피해자들 대부분이 피해를 인지하고도 고소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배신한 가족 외에 다른 보호자가 없어 고소 이후의 삶을 걱정하는 경우다. 어렵게 고소하고도 의사가 무시되거나 고소능력이 부인되는 상황에 마주치기도 한다.

후견 관련 사건을 다수 수행한 전창훈 법무법인 진성 변호사는 "대다수가 가까운 가족이 재산을 횡령하거나 배임했다는 의혹으로 시작한다"며 "제3자였다면 당연히 처벌받아야 하는 행위인데 단순히 가족이라는 이유로 형사 사건이 되지 않으니 과거의 피해는 포기하고 앞으로의 피해라도 방지하자는 차원의 후견인 신청"이라고 설명했다.

전 변호사는 "피해자들의 인지능력이 떨어져 상황에 대한 이해가 어렵고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친족상도례로 피해를 구제받지 못하는 경우가 계속되는 만큼 시대적 흐름에 맞는 규정인지 되짚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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