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만에 "잡았다 이놈"…살인자 마스크엔 '이것' 있었다

머니투데이 김인한 기자 2022.09.0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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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과수, DNA '40억분의 1g'만 있어도 분석
미제사건 DNA 손상 막으려 영하 80℃ 보관
"전문가, 국내 90명 뿐…인력 절대적 부족"

대전 국민은행 권총 강도살인 사건에 실마리를 제공한 과학기술. / 그래픽=최헌정 머니투데이 디자인기자대전 국민은행 권총 강도살인 사건에 실마리를 제공한 과학기술. / 그래픽=최헌정 머니투데이 디자인기자


완전 범죄를 꿈꿨던 살인자는 과학기술 앞에 무릎을 꿇었다. 2001년 12월 '대전 국민은행 권총 강도살인' 사건을 저지른 피의자 이승만·이정학의 이야기다. 이들은 범행 당시 복면을 쓰고 지문을 남기지 않는 치밀함을 보였지만, 결국 보이지 않는 지문인 'DNA'(유전자 정보)에 덜미를 잡혔다. 이번 사건은 33년 만에 풀린 '화성 연쇄살인사건'에 이어 과학수사의 중요성을 또 한 번 일깨워주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2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경찰청에 따르면 21년 전 대전 국민은행 권총 강도살인 사건은 DNA 과학수사의 발전, 살인죄 공소시효 폐지, 형사의 끈질긴 집념 등이 아우러진 결과다. 그중에서도 현장 증거가 제한된 상황에서 유일한 단서, 즉 DNA 대조를 통해 사건의 실마리가 조금씩 풀렸다.



흉악범의 '완전 범죄' 꿈은 어떻게 몽상이 됐나
(대전=뉴스1) 김기태 기자 = 21년 동안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던 대전 국민은행 권총 강도 살인 사건의 피의자 이승만(왼쪽)과 이정학이 2일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2022.9.2/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대전=뉴스1) 김기태 기자 = 21년 동안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던 대전 국민은행 권총 강도 살인 사건의 피의자 이승만(왼쪽)과 이정학이 2일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2022.9.2/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번 사건의 '스모킹 건'(결정적 증거)은 범행 당시 피의자들이 도주차량에 남긴 청색 마스크, 손수건, 차량용 썬팅 필름이었다. 경찰은 사건 직후 국과수에 DNA 분석을 요청했고, 당시 국과수는 청색 마스크에서 신원 미상의 DNA를 확보했다.



국과수는 2000년대초 기술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DNA를 보관해왔다. 그러던 중 경찰이 2015년 충북의 한 불법게임장을 단속했고, 그 과정에서 달아난 이들의 소지품과 담배꽁초 등으로부터 다수의 DNA를 확보했다. 국과수의 범죄 데이터베이스와 대조한 결과, 게임장에 출입한 신원 미상의 인물이 국민은행 권총 강도살인 사건 용의자와 일치했다.

경찰은 그때부터 용의 선상에 1만5000여명을 올리고, 5년간 이들 DNA를 일일이 대조했다. 지난 3월 유력 용의자로 이정학을 특정하고, 이번달 중순 체포영장을 발부해 이정학과 이승만을 모두 검거했다.

김정민 경찰청 과학수사기법계장은 이날 머니투데이와 통화에서 "기술 발전을 믿고 경찰이 현장 증거물을 원형 그대로 보관했던 게 사건의 실마리를 푸는 첫 단추였다"며 "DNA 단서가 없었다면 장기미제 사건을 풀 수 없었다"고 했다.


DNA 앞에 완전 범죄 없다…국과수, 손상 막으려 영하 80℃ 보관
현재 우리나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40억분의 1g'에 해당하는 0.25ng(나노그램, 1ng=10억분의 1)만 있어도 DNA를 증폭시켜 분석할 수 있다. / 사진제공=국립과학수사연구원현재 우리나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40억분의 1g'에 해당하는 0.25ng(나노그램, 1ng=10억분의 1)만 있어도 DNA를 증폭시켜 분석할 수 있다. / 사진제공=국립과학수사연구원
DNA는 한 사람의 유전 정보를 담은 기본단위다. 인간의 모든 세포에는 세포핵이 있고, 그 세포핵 속에는 염색체가 있다. 염색체는 DNA가 모여 만들어진다. DNA는 꽈배기처럼 꼬여 있는 '이중나선' 구조다. DNA는 30억개 염기로 구성되는데, 사람마다 DNA 특정 위치에 염기서열 일부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국과수는 이처럼 사람마다 특정 위치에 '짧게 반복되는 염기서열 부위'(STR)를 증폭시켜 유전자를 식별한다. 예컨대 DNA가 가느다란 실이라면, STR 부위는 실 중 짧은 특정 부분이다. 현재 국과수는 '40억분의 1g'에 해당하는 0.25ng(나노그램, 1ng=10억분의 1)만 있어도 DNA를 증폭시켜 분석할 수 있다.

김응수 국과수 법과학부 유전자과장은 이날 머니투데에 "현재 장기 미제 사건의 DNA가 손상되지 않도록 영하 80℃에서 초저온 보관중"이라며 "국민은행 권총 강도살인 사건도 초창기 STR 분석으론 유전자 분석에 한계가 있었지만 2017년 진보된 기술을 통해 유전자 20개 중 20개가 모두 일치한다는 사실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DNA 분석 전문가, 국내 90명 뿐…인력 절대적 부족"

김응수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과학부 유전자과장은 2일 머니투데이와 통화에서 DNA 분석기술의 중요성과 향후 전문가 수급 문제가 시급히 다뤄져야 한다고 제언했다. / 사진제공=국립과학수사연구원김응수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과학부 유전자과장은 2일 머니투데이와 통화에서 DNA 분석기술의 중요성과 향후 전문가 수급 문제가 시급히 다뤄져야 한다고 제언했다. / 사진제공=국립과학수사연구원
우리나라는 1991년 국과수 내 유전자분석실을 최초 설치했다. 이듬해부터 DNA 분석과 감정업무를 시작했다. 2010년에는 'DNA 신원확인 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DNA법) 시행에 따라 수사기관은 살인·강간 등의 범죄자 DNA를 채취해 데이터베이스(DB)로 저장했다. 이는 DB 구축 전부터 국과수의 자체 노력으로 DNA 보관이 이뤄져 이번 사건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김응수 국과수 과장은 "국민은행 권총 강도살인 사건이 벌어진 2000년대 초만해도 DNA를 보관해야 한다는 법적 근거는 없었다"며 "하지만 기술발전을 믿고 강력범죄 DNA를 보관하고 꾸준히 기술을 진화시켜온 것이 이번 사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DNA 분석 수요가 급증하는데 반해 인력 증원이 부족해 일선 현장에 과부하가 걸린다고 토로했다. 김 과장은 "DNA 분석 전문가는 전국적으로 90명에 불과하지만 감정량은 폭증해 업무 피로도가 높은 상황"이라며 "이번 사건을 계기로 DNA 분석 전문인력 확보 문제가 해결되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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