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경위 승진 직후 서울 서부경찰서 녹번파출소 소속 한상욱 경위의 모습./사진제공=한상욱 경위
이후 B씨가 몇 차례 전화를 받지 않자 불안한 낌새를 느낀 A씨가 곧바로 112에 신고를 냈던 것이다. 곧바로 서부경찰서 녹번파출소에는 '코드 1(원)'이 떨어졌다. 요구조자 또는 피해자의 생명, 신체가 위험하다고 판단될 때 발령되는 즉시대응체계다.
수면제 50알 먹은 자해기도자 골든타임 사수 배경에는?
지난 21일 오전. 야간근무를 마친 서울 서부경찰서 녹번파출소 소속 한상욱 경위의 모습./사진제공=한상욱 경위
한 경위는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된다"고 판단했다. 더구나 현장에는 경찰의 공조요청을 받고 출동한 119 구조대 역시 와있는 상황이었다. 한 경위는 곧바로 서부서 112치안종합상황실에 특정조회를 요청했다. 특정조회란 이름, 나이, 대략적 주소 등을 통해 유사한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녹번동 살면서 B씨와 이름과 나이가 같은 사람의 주소를 추려내는 식이다.
주소를 특정한 한 경위는 오후 1시20분 녹번동 한 빌라 반지하에 있는 B씨의 집 앞에 도착했다. 한 경위가 문을 수 차례 두드려봤지만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문 너머로는 TV소리 하나 새어나오지 않았다. 최초 신고 이후 30분 가량 지체된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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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구조대는 현관문을 열고 진입하려 했지만 한 경위는 그 시간마저도 아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변을 살펴보던 한 경위의 눈에 B씨의 집으로 들어가는 작은 창문이 하나 보였다. 창문에는 방범창살이 굳게 가로막고 있었다. 곧바로 한 경위와 구조대는 방범창을 해체하고 B씨의 집에 들어섰다.
B씨는 안방 침대에 홀로 누워있었다. 한 경위가 흔들어 의식을 확인해보니 B씨의 입에선 흐린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엇을 먹었냐고 물어봤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만 돌아왔다. 거실에는 딱 한 알만 남은 수면제로 추정되는 약통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곧바로 인근 병원으로 이송된 B씨는 응급조치를 받고 목숨을 건져 딸에게 인계됐다. 경찰과 구조대가 B씨의 골든타임을 사수한 배경에는 빠르게 주소를 확인하고 개문보다 시간이 덜 드는 창문을 선택한 한 경위의 판단이 있었다.
아버지는 마포, 아들은 서부…경찰 父子
1990년. 서울 서부경찰서 녹번파출소 소속 한상욱 경위의 아버지인 한준수씨(85)의 모습. 한씨는 1998년 경위로 정년퇴직했다./사진제공=한상욱 경위
그런 그를 경찰의 길로 이끈 건 경찰이었던 아버지 한준수씨(85)였다. 한씨는 마포서 합정파출소장·상수파출소장 등을 거쳐 상암파출소장 직을 끝으로 정년퇴직했다. 한씨는 이외에도 경찰 생활 대부분을 마포 지역에서 보냈다고 한다.
반면 한 경위는 서부경찰서 붙박이다. 마포구 일대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인근 지역인 은평구 서부경찰서에서 경찰 생활 대부분을 보냈다. 1999년 초임지인 신사2파출소(현재 신사지구대)를 시작으로 교통과·생활안전과 등을 거쳐 현재 녹번파출소까지. 기동대 의무복무 기간을 제외하면 모든 경찰 경력을 서부경찰서에서만 쌓았다.
한 경위는 아버지에 대해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라고 말한다. 한 경위에게 아버지는 인생의 멘토이자 경찰 선배다. 길을 잃을 때면 언제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
오토바이 절도범이 기승을 부리던 초임 순경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절도가 발생하면 CCTV(폐쇄회로TV)를 통해 동선 추적을 했는데 당시는 지금처럼 CCTV가 많은 환경이 아니었다. 행적을 따라가다보면 길이 끊기기 일쑤였다. 그때 한씨는 아들 한 경위에게 "가출 청소년 등이 무리지어 생활하는 곳을 따라가보라"고 넌지시 조언했다고 한다.
경찰 선배이자 아버지인 한씨는 한 경위에게 "항상 겸손하고 낮은 데서 높은 데를 올려다보지 말고 살라"고 했다. 그러면서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경찰의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 가르침 때문인지 한 경위는 다치거나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눈을 돌린다.
한 경위는 극단적 선택을 기도했다 살아난 B씨를 떠올리면서도 "살아주셔서 고맙다"고 말한다. B씨가 사건 이후 기력을 회복해 딸과 함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한 경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경찰이든 소방대원이든 누구든 다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 경위는 앞으로도 서부경찰서 지역경찰로 남고 싶다고 한다. 한 경위는 "인생 대부분을 여기서 보내서 그런지 다른 지역보다 애정이 간다"며 "계속 이곳에 남고 싶다"고 한다. 그러면서 "경찰에 신고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약자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라며 "그런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어서 가장 보람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퇴임을 7년 가량 앞둔 한 경위는 또 "주민들에게 고마운 경찰,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따뜻한 경찰로 남고 싶다"고 소망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