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 순위 확 뒤집혔는데…韓 뼈아픈 '그 나물에 그 밥'

머니투데이 심재현 기자, 한지연 기자 2022.06.2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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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금융위기에서 코로나까지…글로벌 기업 10년의 흥망성쇠(上)

석유의 종말, 플랫폼의 부흥…돈맥을 읽는 자, 세상을 잡았다
글로벌 기업 순위 확 뒤집혔는데…韓 뼈아픈 '그 나물에 그 밥'


#. 글로벌 시장의 1990년대는 일본 종합상사의 시대였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에도 한동안 일본의 제조업은 건재했다. 새천년 들어 주도권은 엑손모빌, 로열더치셸, GM, 포드 등 미국이 이끄는 석유화학과 자동차로 넘어갔다. 특히 폭발적인 에너지 수요가 소환한 석유기업의 위상은 2010년대까지 이어졌다. 굳건했던 석유 부흥기에 균열을 낸 건 애플·아마존 등 실리콘밸리에서 태동한 디지털 정보통신 플랫폼이다. 2020년 전후로 주연 자리를 꿰찬 이른바 테크기업의 부상은 전통적인 방식의 제조산업을 대체한 4차 산업혁명, 패러다임 대전환으로 불린다.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과 인터브랜드의 글로벌 100대 브랜드로 집계된 전 세계 최상위 매출 기업, 시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브랜드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주도산업의 흥망성쇠와 자본의 흐름이다. 머니투데이는 한국경제연구원과 공동으로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과 인터브랜드 글로벌 100대 브랜드를 바탕으로 글로벌 산업 변화와 국가별 기업 경쟁력을 집중 분석했다.



글로벌 기업 순위 확 뒤집혔는데…韓 뼈아픈 '그 나물에 그 밥'
최근 10여년 동안 글로벌 산업 구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 3가지로 전문가들은 아이폰의 등장과 2008년 금융위기, 코로나19 팬데믹을 든다.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10년 이상 이어진 양적완화로 한 손에는 넘치는 자금을, 다른 손엔 스마트폰을 든 인류는 세계 경제의 판도를 바꾸는 동시에 글로벌 핵심 산업 재편을 가속했다. 미국의 백화점을 벼랑 끝까지 몰아넣은 아마존과 은행산업을 바꾼 인터넷전문은행이 대표적이다. 2010년대가 마무리될 쯤 터진 코로나19 사태가 IT 기술과 맞물린 이런 변화의 속도를 더 부채질하면서 혁신하지 못한 기업은 줄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011년과 2021년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을 비교하면 이런 변화가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2011년 500대 기업 가운데 183개사가 2021년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의 3분의 1이 물갈이된 셈이다. 범위를 10위권으로 좁히면 로열더치셸(2위)을 필두로 엑손모빌(3위), BP(4위), 시노펙(5위), CNPC(6위), 셰브론(10위) 등 석유회사가 주름을 잡았던 2011년과 달리 2021년 명단에서 석유회사는 CNPC(4위), 시노펙(5위) 등 2곳에 그친다. 석유회사의 빈 자리는 아마존(3위), 애플(6위), CVS헬스(7위), 유나이티드헬스(8위) 등 ITC·바이오 플랫폼 기업이 채웠다.



기술업종에서 휴렛패커드(HP·28위→182위), 파나소닉(50위→154위), 텔레포니카(스페인 이동통신업체·78위→223위) 등 하드웨어 업체가 100위권 밖으로 밀려나고 알파벳(구글 모회사·22위), 알리바바(63위), 메타(페이스북 모회사·86위) 등 소프트웨어에서 강점을 보인 4차 산업 기반 기업이 부상한 것도 두드러진 변화다. 상품이 아닌 서비스와 플랫폼이 지배하기 시작한 시장은 제조업의 영원한 아이콘이자 2011년까지 글로벌 시가총액 1위였던 GE가 2018년 6월 다우존스지수 구성종목에서 퇴출당한 데서도 확인된다.

글로벌 기업 순위 확 뒤집혔는데…韓 뼈아픈 '그 나물에 그 밥'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석유와 자동차의 쇠퇴는 2030년까지 앞으로 8~9년 안에 자동차와 원유 수요가 정점을 찍을 것이라는 '피크쇼크' 전망과도 맞물린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19년 11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전 세계 원유 수요 증가율이 2030년부터 거의 멈출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실 소유의 석유회사인 아람코가 증시에 상장한 것도 세계적인 '탈석유' 움직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대목이다.

국가대항전에 초점을 맞추면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견제가 더 거세졌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 이어 조 바이든 대통령까지 대중(對中) 무역전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의 국가별 매출은 2021년 기준 미국이 9조6500억달러, 중국이 8조9236억달러로 비슷한 수준이다. 같은 기간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에 오른 중국 기업은 135개사로 미국(122개사)을 이미 앞질렀다.


문제는 다시 한국이다. 한국 기업은 이런 세계적 흐름에서 여전히 동떨어져 있다. 삼성전자(2011년 22위→2021년 15위)를 빼면 현대차(55위→83위), SK(82위→129위), LG전자(171위→192위), 포스코(161위→226위) 등 대다수 기업의 순위가 떨어졌다. 단순히 기업의 순위 하락만이 아니라 10년 내내 순위권 기업이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점이 더 뼈아프다. 미국의 플랫폼 기업에 비하면 미약하지만 서서히 영토를 넓혀가고 있는 '네카라쿠배'(네이버·카카오·라인·쿠팡·배달의민족)가 그나마 위안이다.

'美中사이 글로벌 넛크래커'…삼성 빼곤, 韓 기업 줄줄이 역주행
/시각물=김현정디자인기자/시각물=김현정디자인기자
한국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이 제자리걸음하고 있다. 전통 강자 미국엔 규모로 뒤처지고 신흥 강자인 중국엔 성장세로 밀리는 넛크래커 형국이다. 전문가들은 산업 포트폴리오 다각화를 통한 신생기업 창출로 글로벌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 한국 기업 경영성과, 미중에 역부족

20일 머니투데이가 '포춘 글로벌 500'에 포함된 한국 기업의 최근 10년 변화 흐름(2011~2021년)을 분석한 결과 한국·중국·미국 가운데 한국의 연평균 매출 증가율이 가장 낮았다.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에 선정된 한국 기업의 합산 매출은 2011년 6601억달러에서 2021년 8044억달러로 늘었다. 연평균 성장률 2%다. 같은 기간 중국의 연평균 성장률은 11.94%(2조8906억달러→8조9236억달러), 미국은 2.35%(7조6505억달러→9조6500억달러)로 모두 한국보다 높았다.

/시각물=김현정디자인기자/시각물=김현정디자인기자
각국 기업의 매출이 글로벌 500대 기업 전체 매출 가운데 차지하는 비중에서도 한국의 증가세가 미국이나 중국에 비해 미약했다. 글로벌 500대 기업의 총 매출은 2011년 29조5000억달러에서 2021년 31조7000억달러로 늘어나는 동안 한국 기업의 매출 비중은 2011년 2.2%에서 2021년 2.5%로 0.3%포인트(p) 늘었다. 같은 기간 중국은 18.4%p(9.7%→28.1%), 미국은 4.5%p(25.9%→30.4%) 증가했다.

매출로 빗대어 본 경영성과 뿐 아니다. 글로벌 500대 기업에 포함된 기업 수도 10년 사이 한국은 14개사에서 15개사로 1곳 느는 데 그쳤다. 6개사가 신규 진입했지만 기존 500대 기업에 포함됐던 5개사가 이탈하면서 유의미한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500대 기업 리스트를 지킨 한국 기업 9곳 가운데 절반이 넘는 5곳의 순위가 떨어진 점도 뼈아픈 대목이다. 삼성전자의 순위가 2011년 22위에서 2021년 15위로 오른 반면 현대차, SK, LG전자, 포스코는 모두 하락했다.

반면 같은 기간 중국은 61개에서 135개로 74개가 늘어났다. 미국은 133개에서 122개로 11개가 줄었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10년 사이 글로벌 시장에선 소프트웨어 중심 신기술과 신산업이 발전했지만 한국은 대부분의 기업이 여전히 기존 제조업 중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순위가 뒤처지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디지털 변환과 4차 산업 혁명 등 산업구조 변화의 흐름을 지금이라도 따라잡지 못하면 기업 경쟁력이 더 하락할 수 있다는 의미다.

/시각물=김현정디자인기자/시각물=김현정디자인기자
■ 중국, 무서운 성장세…미국, 전통 강자 유지

글로벌 500대 기업 가운데 10년 사이 단연 돋보이는 국가는 중국이다. 연평균 매출 증가율과 매출비중 변화, 기업 수 변화 모두 1위를 차지하며 무서운 성장세를 나타냈다. 미국의 경우 500대 기업 수는 줄었지만 매출 1위 국가 자리를 10년째 지켜면서 원조 경제대국의 저력을 보였다.

전문가들은 지난 10년 사이 글로벌 기업 경쟁력이 미국과 중국의 '빅2' 중심으로 집중되는 경향이 심화하면서 미중 사이에 낀 한국 기업의 경쟁력 강화가 시급해졌다고 지적한다. 글로벌 500대 기업의 매출 총액 가운데 미국과 중국 기업의 매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60%에 이른다.

개별기업을 살피면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에서 2011년만 해도 삼성전자가 22위, 애플은 111위, 화웨이는 352위였지만 10년 새 순위가 애플 6위, 삼성전자 15위, 화웨이 44위로 바뀌었다. 국내 대표기업인 삼성전자만 놓고 봐도 애플에 역전을 허용하고 화웨이와의 격차는 눈에 띄게 좁혀졌다는 얘기다. 재계에서 자칫하면 500대 기업 수와 매출이 모두 크게 줄어든 일본의 전철을 뒤따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이상호 전국경제연합회(전경련) 경제정책팀장은 "정부 지원이 뒷받침되는 관영 기업 위주의 빠른 성장세를 보인 중국과 한국을 단편적으로 비교하긴 어렵다"면서도 "글로벌 시장에서 중국이 한국의 경쟁자라는 것은 분명한만큼 한국 기업의 경쟁력 강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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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생기업 키우고, 기존 기업 경쟁력 강화해야"

시급한 과제로는 산업구조 재편을 통한 신생기업 출현이 첫 손에 꼽힌다. 성장세가 컸던 중국뿐 아니라 전통 강자인 미국에서도 넷플릭스 등 신생 기업이 글로벌 500대 기업에 새롭게 진입했지만 한국은 삼성전자와 현대차 등 기존 제조업 대기업이 여전히 주류다.

순위가 밀린 기존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선 연구개발(R&D) 투자 확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전경련은 2021년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에 포함된 업종별 한국 선두 기업과 세계 선두 기업의 R&D 집중도(매출액 대비 R&D 비용)를 비교한 결과 대부분의 한국 기업이 세계 선두 기업보다 부진했다고 밝혔다. 원자재 분야 포스코의 R&D집중도가 0.2%로 경쟁사인 중국 오광그룹(2.1%)의 10분의 1 수준에 그쳤다. 화학 분야의 독일 바스프는 LG화학보다 R&D집중도가 5배 높고 자동차 분야에서 일본 토요타의 R&D 집중도는 현대차보다 3.2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산업 전반적으로 규제완화를 통해 기업이 사업 분야와 범위를 자유롭게 확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조언도 거세다. 이 팀장은 "한국은 일반 R&D 세액공제율이 2%인 데 비해 미국은 7% 가까이 된다"며 "그밖에도 공공 소프트웨어 사업 진입 제한과 중소기업 적합 업종 규제 등 기업 규모에 따른 차별 규제가 많아 기업들의 활동 범위가 지나치게 구속돼 있다"고 지적했다.

유환익 전경련 산업본부장은 "창업 생태계 확산과 산업 포트폴리오 다각화 등을 통해 다양한 산업군에서 새로운 글로벌 기업들이 탄생해야 한다"며 "CVC(기업형 벤처캐피털) 규제완화 등 새로운 기업이 진출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고 대기업 집단 규제도 완화해 기업들이 더 성장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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