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시평]'소환술사'의 몰락

머니투데이 신민영 법무법인 호암 변호사 2022.05.30 02:03
글자크기
신민영 변호사신민영 변호사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는 생전에 감투를 참 좋아하셨다. 초등학교 동창회 간부 자리부터 주부노래교실 회장, 산악회의 회장, 통장, 바르게살기위원회 임원, 청소봉사단 임원, 공정선거감시단 등등. 임원이 내야 하는 각종 찬조금 때문에 가정경제가 휘청거릴 지경이었지만 자식인 내 입장에선 재미나게 사는 어머니를 어떻게든 도와드리고 싶었을 뿐이다. 다만 단 한 번 어머니의 감투수집을 극렬히 반대한 적이 있는데 바로 아파트 동대표였다. 내가 아는 한 아파트 동대표는 무척 위험한 직책이기 때문이다.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많이 만난 직책을 꼽아보라면 제일 먼저 아파트 동대표가 떠오를 정도다.

왜 동대표는 자꾸 형사재판에 불려오는 걸까. 아파트 관리비를 떼먹어서? 적어도 내가 맡은 동대표 사건 중 관리비를 떼어먹거나 업체로부터 금품을 수수해 문제가 된 건은 단 한 건도 없다. 동대표들을 재판정으로 불러들이는 죄는 대체로 명예훼손죄, 아니면 모욕죄다. 처음으로 변호를 맡은 아파트 동대표 사건 역시 그랬다. 어머니 나이 또래였던 동대표는 주민들에게 "입주자대표 회장에게 전과가 있다"고 말하는 바람에 형사재판을 받게 됐다. 실제 회장은 전과자지만 우리나라 형법은 사실을 적시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도 명예훼손죄로 처벌하도록 한다(형법 제307조 제1항). 다만 이런 행동이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인 경우에만 위법성이 없다고 봐서 무죄를 선고할 뿐이다(형법 제310조).



동대표는 조문에 대한 설명도 끝나기 전에 "본인은 공익을 위해 그런 것"이라며 억울해 했다. 하지만 이어진 해명은 태풍이 치는 파도처럼 격렬하기만 할 뿐 도저히 종잡을 수 없었다. 앞의 얘기가 달려오는가 싶더니 어느샌가 뒤의 얘기가 달려와 앞의 얘기의 허리를 자르고는 함께 쓸려갔다. 회장의 숨기고 싶은 과거를 들춘 것이 왜 공익과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간 회장과 있었던 대소사를 한참 듣고 나서야 갈등의 시작이 아파트 공용공간을 한 보육업체에 염가로 빌려준 것에 있음을 알게 됐다. 동대표는 회장이 해당 업체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고 회장은 회장대로 이유를 설명하던 끝에 서로 격해져 형사재판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동대표 역시 회장을 모욕죄로 고소해 재판이 진행 중이었는데 동대표를 두고 회장이 "그 사람 말 믿지 마라. 정신병자다"라고 말한 것 때문이다. 그 사이 보육업체 임대료의 적정성 여부는 뒷전이 돼버렸다. 주민들 역시 각자 생업에 바빠 이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다.

정치적 논쟁이 한창일 때마다 그간 맡은 동대표 사건들이 떠오르곤 한다. 주민들과 소통하면서 대소사를 처리하라고 뽑힌 대표들이 서로 말꼬리를 잡고 싸우는 사이에 현안은 증발해버리는 장면, 어딘가 낯익지 않은가. 정치인은 현실에 존재하는 소환술사다. 소환술사들이 영험한 존재를 전장으로 불러내 적을 쓸어버리듯 정치인들은 대의를 조직해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들 아니든가. 소환술사들이 소환술이 아닌 방식으로 싸우면 이들을 대체 뭘로 불러야 하는 걸까. 정치로 해결돼야 할 문제들이, 혹은 정치인들끼리의 문제들이 법정으로 넘어올 때마다 든 의문이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