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는 맞고 이재용은 틀리다(?)

머니투데이 심재현 기자 2022.04.2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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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는 세상]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3월31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삼성 부당합병 의혹' 38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뉴시스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3월31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삼성 부당합병 의혹' 38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럴 줄 몰랐다. 최악의 경우라도 수년 동안은 탄탄할 거라 믿었던, 기술의 삼성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하릴없이 흔들린다. GOS(게임 최적화 서비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수율, 모바일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존재감을 두고 최근 이어진 논란의 바탕에 삼성의 기술력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급기야 내부에서도 위기론이 튀어나온다. "위기라는 이야기를 꽤나 많이 들어왔지만 그 어떤 때보다도 지금 이 순간이 위태롭다고 여겨지는 요즘입니다." 어느 CEO(최고경영자)가 읊조였을 법한 이 문구는 자신을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 입사 4년차라고 밝힌 엔지니어가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문제의 근본원인을 파악해달라며 보낸 이메일의 한 대목이다.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저편의 불안이 시차를 두고 잇단 편린으로 불거지면서 미래를 압박한 결과다.



표면적으로는 반도체 호황에 따른 안주와 새로운 성장동력 발굴 미흡, 비대해진 조직의 시장 대응 속도 저하 등 갖가지 그럴싸한 이유가 동원되지만 조직적으로 긴장감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긴장을 불어넣을 동력이 마땅찮은 상황이다.

'60세 룰'을 내세워 대대적인 쇄신을 얘기한 게 벌써 5년 전이다. 매년 경영진을 손보지만 수순밟기에 그친다. 정해진 로드맵을 따라 구세대가 퇴진하거나 깜짝 인사 한두명으로 변주곡을 연주하는 게 파격으로 평가받는 수준이다. 조금 거친 말이지만 이런 '찻잔 속 태풍'으로 기대할 수 있는 쇄신은 많지 않다.



정부와 달리 기업에서 '전면 개각'이 쉽지 않은 것도 맞다. 표심에 따라 틈나는대로 뒤바뀔 운명의 정치집단과 달리 시장과 기술, 조직이 맞물린 지속가능성을 좇는 기업은 역사성과 노하우를 계승하고 공유한 '길러진 후보군'에서 차기를 찾을 수밖에 없다. 뒤집어 말하면 가장 역동적인 시장에서 경주하는 기업이 쇄신에 더딜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국내 기업에선 그동안 이런 어긋난 정체성의 틈새를 총수가 메워왔다. 총수를 구심점으로 한 리더십이 위기 극복의 동력이자 미래준비의 산파 역할을 했던 게 사실이다. 언제적 총수론을 꺼내드느냐고 비아냥대더라도 할 수 없다. 옳고 그름을 떠나 주어진 현실이 그렇다는 얘기다. 대통령이 대기업 총수를 찾고 삼성전자 노조가 임금협상 타결을 이 부회장 자택 앞에서 촉구하는 이유에서 눈 돌릴 순 없다.

문제는 삼성의 총수가 처한 작금의 현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는 7월까지 형기 만료 3개월을 남긴 가석방의 무게가 만만찮다. 형기가 끝나도 지금 상태론 5년 동안 취업제한 논란에 시달려야 한다. 사법정의와 형평성을 외치면서도 정작 국정농단의 중심이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면에는 큰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시선이 이 부회장에게는 유난히 따갑다. 한 발을 교도소 담장에 걸친 일상이 조직에 긴장을 불어넣고 쇄신을 이끌어내긴 쉽지 않다.


껄끄러운 문제라고 미뤄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별로 없다.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우린 '이재용 문제'를 보다 진지하게 논의했어야 할 시간을 별다른 각오 없이 흘러보냈다. 우리가 손 놓고 있다고 해서 남들도 기다려주진 않는다. 대마불사가 허상이라는 건 숱한 기업사(史)가 보여준다. 삼성도 그렇다. 선택의 모래시계가 다 흘러내린 뒤엔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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