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3월31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삼성 부당합병 의혹' 38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급기야 내부에서도 위기론이 튀어나온다. "위기라는 이야기를 꽤나 많이 들어왔지만 그 어떤 때보다도 지금 이 순간이 위태롭다고 여겨지는 요즘입니다." 어느 CEO(최고경영자)가 읊조였을 법한 이 문구는 자신을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 입사 4년차라고 밝힌 엔지니어가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문제의 근본원인을 파악해달라며 보낸 이메일의 한 대목이다.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저편의 불안이 시차를 두고 잇단 편린으로 불거지면서 미래를 압박한 결과다.
'60세 룰'을 내세워 대대적인 쇄신을 얘기한 게 벌써 5년 전이다. 매년 경영진을 손보지만 수순밟기에 그친다. 정해진 로드맵을 따라 구세대가 퇴진하거나 깜짝 인사 한두명으로 변주곡을 연주하는 게 파격으로 평가받는 수준이다. 조금 거친 말이지만 이런 '찻잔 속 태풍'으로 기대할 수 있는 쇄신은 많지 않다.
국내 기업에선 그동안 이런 어긋난 정체성의 틈새를 총수가 메워왔다. 총수를 구심점으로 한 리더십이 위기 극복의 동력이자 미래준비의 산파 역할을 했던 게 사실이다. 언제적 총수론을 꺼내드느냐고 비아냥대더라도 할 수 없다. 옳고 그름을 떠나 주어진 현실이 그렇다는 얘기다. 대통령이 대기업 총수를 찾고 삼성전자 노조가 임금협상 타결을 이 부회장 자택 앞에서 촉구하는 이유에서 눈 돌릴 순 없다.
문제는 삼성의 총수가 처한 작금의 현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는 7월까지 형기 만료 3개월을 남긴 가석방의 무게가 만만찮다. 형기가 끝나도 지금 상태론 5년 동안 취업제한 논란에 시달려야 한다. 사법정의와 형평성을 외치면서도 정작 국정농단의 중심이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면에는 큰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시선이 이 부회장에게는 유난히 따갑다. 한 발을 교도소 담장에 걸친 일상이 조직에 긴장을 불어넣고 쇄신을 이끌어내긴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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껄끄러운 문제라고 미뤄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별로 없다.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우린 '이재용 문제'를 보다 진지하게 논의했어야 할 시간을 별다른 각오 없이 흘러보냈다. 우리가 손 놓고 있다고 해서 남들도 기다려주진 않는다. 대마불사가 허상이라는 건 숱한 기업사(史)가 보여준다. 삼성도 그렇다. 선택의 모래시계가 다 흘러내린 뒤엔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