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시평]'5·18시민군' 상황실장 박남선의 미덕

머니투데이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 2021.11.05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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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진원 교수채진원 교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례식은 우리의 아픈 상처와 책임에 대해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5·18 광주 유혈진압 책임과 관련, 노 전대통령은 아들 노재헌씨를 통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는 유서를 공개했지만 5·18단체는 "시민을 학살한 책임을 덮을 수 없다"고 반발했다.

노 전대통령에게 부정적 감정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그는 12·12 쿠데타를 일으키고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무력진압한 신군부 2인자로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반란수괴·내란목적 살인 등 죄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아픈 과거사를 치유하고 미래로 가자고 수없이 외쳤다. 가해자의 사과와 피해자의 용서를 통한 양자간 화해라는 '회복적 정의관'을 이상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복수와 보복을 전제로 책임을 물어 과거사를 청산하는 '응보적 정의관'이 주류였다.

이번 장례식은 이례적으로 회복적 정의관의 실현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5·18 당시 최후의 항전과 전남도청 사수를 결의한 시민군 상황실장 박남선씨가 빈소에 조문하고 가해자를 용서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일은 기적에 가깝다.



박남선씨는 계엄군에게 체포돼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3년간 복역한 상처받은 영혼이다. 박남선씨는 빈소에서 유족의 손을 잡아주며 "이제 하나가 된 대한민국을 위해 화해하고 화합하고 용서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정말 진정으로 용서한 것일까. 그렇게 용서해도 되는 것일까. 그는 어떻게 빈소까지 오게 된 것일까. 이런 질문에 '임민혁이 만난 사람'(조선일보)은 박남선씨가 조문하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노재헌씨가 처음 광주에 왔을 때 나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했는데 만나지 않았다. 두 번째부터 만났는데 나는 '아들이 와서 사죄하는 것보다 당사자가 직접 와서 육성(肉聲)으로 사과하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노 전대통령은 계속 누워 있고 필담을 겨우 하는 정도라고 하더라. 병상에서 끌고 내려오라고 할 순 없지 않나. 노씨는 그후에도 계속 내려왔다. 5·18 행사 때 쓱 참배하고 가버리는 정치인들보다 진정성이 있다고 봤다. 마지막 만났을 때 노씨에게 5·18 기념배지를 달아주면서 '5·18 정신 꼭 기억해라. 그리고 만약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찾아가겠다'고 했다."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용서'와 '약속'이라는 행위를 통해 훼손된 공동체의 정치적 미덕을 회복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용서와 약속만이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잘못과 죄의 수렁에서 그리고 보복의 악순환에서 탈출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어울려 살 수 있게 하는 회복의 치료제라고 보았다.

5·18단체들이 반발하는 상황에서 박남선씨의 용서와 화해의 손짓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박남선씨는 목숨을 건 시민군 참여에 이어 용서와 화해까지 헌신하면서 민주공화국을 지키는 애국시민의 미덕을 보여줬다. 이제 우리가 그의 영혼을 위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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