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쿠로 마나베(왼쪽)와 프랜시스 페이턴 라우스는 각각 연구 업적을 완성한 후 노벨상을 받기까지 50여년의 시간이 걸렸다./사진=AP/Nobel Prize 홈페이지.
#2. 1966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한 미국의 병리학자 프랜시스 페이턴 라우스는 고형암을 유발하는 바이러스를 발견, 암이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을 처음 규명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1879년생인 그는 만 87세가 돼서야 노벨상과 인연이 닿았다. 하지만 바이러스 발암 사실을 처음 알린 라우스의 논문은 그가 만 32세였던 1911년, 일찌감치 '미국 의학회잡지'에 실렸다. 노벨상 수상까지 무려 55년이 걸렸다.
■ 최근 10년 노벨과학상, 연구부터 수상까지 31.2년
업적부터 수상까지의 시간차가 짧은 사례도 없지는 않다. 아인슈타인이 1915년 예측한 중력파를 100년만에 관측한 연구진은 2년 후인 2017년에, 가설로만 존재했던 '힉스 입자'를 2012년 발견한 연구진도 이듬해 노벨물리학상의 주인공이 됐다. 하지만 흔치 않은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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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숙의 시간' 필요…"노벨상 후보, 수십명 보유해야"
노벨상
2000년 이후 일본이 무려 19명(일본 국적자 또는 일본계)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것도, 일본의 기초과학 수준이 급상승했다기보다는 그간의 축적된 역량이 점차 인정받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손석우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는 "마나베 교수의 연구는 1960년대 업적이다. 우리나라는 기상학자도 없던 시절"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노벨과학상에 닿을 만한 인재와 업적이 조금 더뎌도 포기하지 않는 '성숙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한국인 최초로 노벨화학상 후보로 거론됐던 현택환 서울대 석좌교수는기자회견에서 "(비록 수상하진 못했지만) 후보로 거론된 것 자체가 우리나라 과학자가 노벨상급 반열에 올랐다는 하나의 좋은 지표"라며 "우리나라 과학기술이 그만큼 수준 높이 올라갔다는 것"이라고 자평했다.
염한웅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은 "한국의 과학자들을 노벨과학상을 노릴 수 있는 직전 단계에 비단 한두명이 아니라 30명, 40명씩 올려놓는 게 중요하다. 수준 높은 과학자들을 발굴·격려하고 지원해 노벨상급 연구들을 다양하게 배출해야 한다"며 "단기간에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스타' 과학자의 탄생이 아니라 노벨상에 도전할 만한 과학자의 '풀(pool)'을 넓혀야 한다는 진단이다.
노벨상 '제로' 벗으려면 "젊은 연구자 맘껏 뛰놀아야"
임혜숙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하우스(How's)카페에서 열린 '청년 과학자 간담회' 에 참석해 청년 과학자들의 고민과 아이디어를 듣고 있다./사진제공=과학기술정통부
#2. 팟캐스트 '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들' 정한별 공동대표는 지난달 28일 임혜숙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간담회에서 "성공보다 실패의 경험이 익숙한 청년 과학자들이 겪는 스트레스·우울감에 대해 사회적 관심과 대책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참석자들도 청년 과학자들의 주된 고민이 연구비 확보와 안정적 연구 환경, 연구실 내 세대 갈등이라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올해도 한국인의 노벨 과학상 수상이 불발됐다. 한국도 세계적 수준의 연구 인프라를 갖춘 만큼 희망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젊은 연구자들이 새로운 연구에 마음껏 몰입할 수 있는 연구환경을 조성하는 게 한국의 첫 노벨상 수상을 위한 선결과제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 韓 과학 인프라는 세계 최고인데...노벨상은 왜 0개?
노벨상 실적이 무색할만큼 한국 연구개발(R&D) 인프라는 세계적 수준이다. 스위스 국제경영연구원(IMD)의 '2021 세계경쟁력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과학 인프라 순위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로, 일본에 앞섰다. 연구개발 인력이나 투자, 특허건수 등 주요 과학인프라 지표도 모두 상위 10위권 안에 있다.
반면 그간 축적된 연구 역량은 짧다. 노벨상 강국인 일본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일본이 기초과학 연구에 총력을 기울인 시기는 이미 메이지 유신 직후부터다. 이때부터 일본은 근대화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 화학과 물리학, 의학 등 기초과학 분야 인재를 적극 양성했다. 특히 2000년대부터 일본은 신진 연구자 지원에도 공을 들였다.
대학에 채용될 신진 연구자를 국가가 결정해 최대 5년간 연구비와 급여를 지원하는 '테뉴어 트랙제도'가 대표적이다. 젊은 연구자가 마음껏 연구에 매진하도록 돕는 것이 기초과학 역량을 키우는 길이라는 판단에서다. 노벨상 수상자의 30% 가량은 핵심연구논문이 이미 30대에 작성한 것으로 조사됐는데 일찌감치 노벨상 '새싹'을 키운 일본의 전략이 통한 셈이다.
IMD 세계 경쟁력 분석 결과 중 한국의 과학 인프라 부문 순위./사진제공=KISTEP
국내 과학계는 '새싹' 연구자들이 도리어 각박한 연구환경으로 인해 무력감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지난달 16일 과기정통부가 주최한 "청년과학기술인과의 대화' 현장에서 이준영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석박사 통합과정생은 "대학원생 연구자를 '연구자'가 아닌 '학생'으로 대우하고, 이런 인식이 연구실 내 수직적인 문화로 이어진다"고 꼬집었다.
이는 교수에 권위적 지위를 부여하면서 대학원생 연구자에 대한 휴가나 급여 차별을 일삼는 현실을 초래한다. 현재 국가연구과제에서 학생 인건비는 학부생 100만원, 석사 과정생 180만원, 박사 과정생 250만원이 '하한선'으로 정해져 있지만 많은 교수들이 '과제참여율'을 핑계로 급여를 인건비를 삭감한다. 행사에 참석한 한 학생 연구자의 "노벨상을 탄 유명한 젊은 연구자들이 생활비 걱정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발언도 눈길을 끌었다. 학생 연구자들의 인건비 기준 현실화 요구가 빗발치는 대목이다.
정부도 문제를 인식하고 적극 지원에 나섰다. 과기정통부는 기초연구 지원 예산을 2017년 1조2600억원에서 내년 2조5200억원으로 2배 가까이 증액했다. 특히 미래유망기술 분야 핵심인재를 양성하고 청년과 신진 연구자, 여성과기인을 지원하기 위한 예산으로는 전년 대비 3.4% 늘린 7300억원을 책정했다.
이와 함께 청년 과학기술인의 성장 지원을 위해 학생인건비 기준 등 관련 제도·체계를 개선하고, 기관별 학생 인건비 관리 현황을 점검하기 위해 통계 분석 체계를 연내 구축할 예정이다. 또 일·가정 양립문화 확산을 목표로 '여성과기인법' 개정을 추진하며, 청년과학자 정책 제안과 연구 교류를 위한 전용 소통채널 '청년과학기술인 협의체'를 구성할 계획이다.
김원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기술경영전문대학원장은 "해외와 달리 현재까지 한국의 기초과학 연구지원이 생애주기 중후반 연구자들에게 집중된 경향이 있다"며 "젊은 연구자들이 새로운 분야에 마음껏 뛰어들 수 있도록 지원이 더욱 확대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