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저녁 8시쯤 서울 관악구의 한 고시원에 사는 김모씨의 방안. 수납장 한켠에 약이 수두룩하다. /사진=김성진 기자.
고시촌이 백발로 물들었다. 사법시험이 폐지되고 고시원을 떠난 청년들의 빈자리는 노인들이 채웠다. 김씨도 그중 한명이다. 그의 삶을 1인칭 시점으로 각색했다.
8일 밤 9시쯤 취재진과 대화를 마친 김씨가 늦은 식사를 위해 고시원 밖으로 나서고 있다.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는 물음에 김씨는 "뒷모습을 찍어주세요"라 말했다. /사진=김성진 기자.
처음부터 혼자는 아니었다. 어릴 적엔 가족과 함께 살았다. 1957년 충남 태안군 안면도에서 태어나 10남매 중 막내로, 귀여움 받으며 컸다. 형, 누나 모두 논일에 힘을 쓰는데 나는 일이 적은 편이었다. 막내니까.
스무살이 되던 1976년 서울로 올라왔다. 첫 직장은 구로구 가리봉동의 가방공장이었다. 월급이 8400원인데 공장은 식비로 매달 5000원씩 뺏어갔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3달 만에 가죽공장으로 직장을 옮겼다. 프레스기로 가죽을 잘랐는데, 당시 많이들 손가락이 잘렸다. 그러다가 굴착기 자격증을 따고 30년 가까이 굴착기 몰았다. 초창기 월급은 17만원이었는데, 공장보다야 낫다는 생각으로 견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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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바뀐 건 34살 다낭신 판정을 받으면서였다. 신장에 물혹이 생기는 만성질환이다. 치료 약이 없어 완치가 불가능하다. 더욱 낙담한 건 다낭신이 '유전 질환'이란 점이었다. 결혼한다면 자녀도 다낭신을 앓을 터였다. '돌연변이'로 혼자 살다 죽자, 했다. 어차피 결혼할 돈도 없었다.
2014년엔 갑작스런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이 때 땅바닥에 머리를 부딪히는 바람에 왼쪽과 오른쪽 눈이 서로 달리 보이는 '복시'가 왔다. 어지러움을 견딜 수 없었다. 병원에서 의사에게 "한쪽 눈을 멀게 해주세요"라고 부탁했다. 안경을 받아 왼쪽 눈에 빛이 통하지 않는 렌즈를 꼈다. 지금도 왼쪽 눈 앞을 손으로 가려야 더 잘 보인다.
김씨가 사는 서울 관악구 고시원 방의 전경./사진=김성진 기자.
더 아픈 건 외로움이다. 내가 피하기도 했지만 결국 연락을 먼저 끊은 건 지인들이었다. 작년엔 20년 동안 알아 온 직장 동료 김씨에게 연락했는데 반가운 눈치가 아니었다. 통화는 했지만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 더는 연락을 안했다. 그가 정상이다.
가족과 연락도 끊겼다. 몇년 전까진 설, 추석에 오라고 전화하더니 요새는 전화도 안 온다. 이번 추석도 별 계획없이 혼자 지낸다. 누군가 찾아온다고 해도 미안할뿐이다.
내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내 몸 하나 건사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공간이다. 밥 해먹을 수 있고, 샤워실과 화장실도 있고, 환기도 잘 되는 그런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