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 무너지지 않기를…135㎝ 가녀린 여성, 제물로 바쳐졌다

머니투데이 유승목 기자 2021.09.07 13:47
글자크기

신라 도성 '월성' 서쪽 성벽에서 인신공희 흔적과 여성 인골 발견…성벽 축조 과정에서 묻힌 것으로 추정

월성 서성벽 문지에서 발견된 여성 인골. 왜소한 체격의 성인 여성으로 인신공희를 위해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제공=문화재청월성 서성벽 문지에서 발견된 여성 인골. 왜소한 체격의 성인 여성으로 인신공희를 위해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제공=문화재청


라틴아메리카(중남미) 고대문명인 아즈텍과 잉카, 마야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희'를 했다는 사실은 흔히 알려져 있다. 미국 유명 배우 멜 깁슨이 연출한 영화 '아포칼립토'가 이를 다루며 헐리우드 뿐 아니라 국내 영화·역사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화제를 낳기도 했다. 잔혹하고 어두운 풍습은 역설적이게도 베일에 쌓인 고대 문명의 신비로움을 더하기 때문이다.

인신공희는 중남미 고대문명의 전유물은 아니다. 기원전 3000~2000년에 발달했던 고대 중국의 룽산(龍山) 문화에서도 인신공희가 발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책을 더듬어 보면 한반도에서도 인신공희 풍습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린 아이를 쇳물에 던져 만들었다는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 설화도 인신공희에서 비롯됐다. 물론 이를 뒷받침할 역사적 실체가 밝혀진 적은 없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역사학계에서 고대 한반도에서 제사를 지내거나 내부결속을 다지기 위해 인신공희를 했다는 사실이 역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신라의 왕성인 월성(사적 제16호)의 성벽 아래에 남녀 인골이 한 구씩 발견되면서다. 2017년 첫 발견 당시만 해도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컸지만, 올해 추가조사를 통해 인골 1구를 새롭게 발견하며 쐐기를 박게 됐다.

신라 토성이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
월성 서성벽 조사구간. /사진제공=문화재청월성 서성벽 조사구간. /사진제공=문화재청
7일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17년 인신공희 사례로 인골 2구가 확인된 월성 서성벽에 대한 추가 발굴을 진행한 결과, 서쪽 성벽 문지(門址·문이 있었던 터)에서 제물로 삼아 묻은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 1구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발굴한 인골은 기존 인골 2구가 있었던 장소에서 50㎝ 떨어진 곳에 놓여 있던 키 135㎝ 정도의 왜소한 체격을 가진 여성으로 추정된다. 곡옥 모양의 유리구슬을 엮은 목걸이와 팔찌를 착용하고 있다. 특히 말, 소 등 대형 동물의 뼈와 제기 등이 함께 발견됐다. 해당 인골이 성벽을 쌓기 전 견고하게 축조되길 바라는 뜻에서 묻힌 인신공희의 제물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사람 뼈가 나왔다고 해서 인공적으로 제사를 지낸 것이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면서 "이번 여성 인골이 발견된 위치나 같이 나온 유물 등을 종합적으로 보면 성벽 축조와 관련해 묻은 게 틀림 없다"고 말했다.

2017년 발굴된 남녀 인골(왼쪽)과 올해 추가 조사에서 발견된 성년 여성의 인골. 인신공희에 함께 쓰인 동물뼈 등도 발견됐다. /사진제공=문화재청2017년 발굴된 남녀 인골(왼쪽)과 올해 추가 조사에서 발견된 성년 여성의 인골. 인신공희에 함께 쓰인 동물뼈 등도 발견됐다. /사진제공=문화재청
이 같은 인신공희는 '인주설화'와 관련이 깊다. 큰 규모의 토목공사나 건축물을 지을 때 사람을 제물로 바치면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고대에는 성벽의 견고함이 국방력 등 국가 경쟁력으로 직결됐기 때문에 그만큼 튼튼하게 지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 월성은 토성에 불과하지만 신라가 쇠망할 때까지 왕궁이 있던 도성이었다.


이성주 경북대 교수는 "중국 상나라 때 성벽 축조시 성벽 내부, 그 중에서도 문지 근처에서 이런 인신공희들을 했는데, 일종의 '퍼블릭 세리모니'로 많은 사람들이 의례를 보며 내부 결속을 다졌다고 한다"며 "초기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의례 형태인데, 국가 형성기에 이런 방식으로 대중을 장악하고 통제력을 높인 것 같다"고 말했다.

월성은 언제 모습을 드러냈나
월성 서성벽 축조공정 모식도. /사진제공=문화재청월성 서성벽 축조공정 모식도. /사진제공=문화재청
실제 월성은 신라가 국가의 기틀을 다져 나가던 초기에 지어진 성곽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월성은 파사왕 22년(101)년에 지어졌다고 나온다. 다만 축조 시기에 대해선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 있다. 옛 문헌과 달리 이번 발굴에서 출토된 유물의 전수 조사와 가속질량분석기(AMS) 연대 분석 등 과학적인 조사를 한 결과 월성 축조 연대가 4세기 중엽~5세기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기록보다 250년 가량 늦은 시기다.

이 시기는 사로국에서 주변 지역 병합을 통해 신라로 서서히 발전하던 시기다. 국가 권위를 세워 나가며 도성을 만들던 시점인 만큼, 대형 토목공사에서 인신공희 의례도 충분히 가능한 셈이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이 시기는 왕호를 마립간이라 하고 적석목곽분이 경주 분지에 축조되는 등 사로국으로부터 신라가 새로 출범하던 양상을 보이는 때"라고 설명했다.

이번 조사를 담당한 장기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월성이 언제 축조되었는지 이제껏 밝힐 수 없었지만 이번 조사를 통해 4세기 전엽~중엽 정도에 축조돼 50년 가량 공사 기간을 들여 완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인신공희 사례를 추가로 확인함에 따라 신라인들이 성벽을 견고하게 쌓고 무너지지 않게 어떤 제의를 했는지 점차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