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바이오기업의 갑을 관계

머니투데이 황만순 한국투자파트너스 대표 2021.08.12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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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순 한국투자파트너스 대표황만순 한국투자파트너스 대표


사전에서 갑을관계를 찾아보면 계약서에서 계약 당사자를 순서대로 지칭하는 법률용어로 수평적 나열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한국에선 상하관계나 주종관계로 인식된다고 한다. 과거 남양유업 사태를 다룬 뉴스에서나 접하던 이 갑을관계가 바이오기업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문하는 분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몇 가지만 생각해보면 바이오기업이야말로 다양한 갑을관계 속에서 사업을 영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코스닥시장에 상장한 바이오기업의 종업원 수를 살펴보자. 시가총액이 10조원에 육박하는 SK바이오팜의 종업원 수는 200명을 약간 상회하고, 시총 1조3000억원인 레고켐바이오도 종업원 수는 100명 수준이다. 생각보다 적은 인력으로 높은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회사 내부와 외부에서 다양한 협업이 이루어져야 함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종업원이 수십 명 이내인 초기 바이오기업들이 신약을 개발하기 위해선 내·외부의 다양한 파트너와 협업이 필요하다. 전임상시험에 필요한 신약 후보물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CMO(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에 의존해야 하고, 독성시험과 임상시험을 위해선 CRO(임상시험수탁기관) 의존이 필요하다. 때로는 허가등록을 위해서도 협업이 필요하고, 수많은 공동연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기술이전이 진행된 이후에도 기술을 제공하는 측은 지속적인 백업연구를 통해 파트너가 후속개발을 잘 진행하도록 하고 제공받은 경우에도 지속적인 정보교류를 통해 더 큰 부가가치를 만들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 이외에도 특허를 출원하는 과정에서 변리사와 관계, 회계법인 및 법무법인과 관계, 상장심사를 위한 주관증권사와 관계 등 수많은 갑을관계 속에 던져진다.



흔히 한국 사회에서 갑을관계는 보수를 지급하는 쪽이 지급받는 대상에게 행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보수를 지급한다 해도, 이른바 을이 어떤 일을 하는지를 조금만 생각해봐도 갑을관계가 역전돼야 함을 쉽게 알 수 있다. 을이 진행하는 업무는 바로 갑의 부가가치 및 존폐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특허를 출원하는 변리사나 독성시험을 수행하는 GLP(비임상시험관리기준)기관 시험책임자의 조그만 정성과 관찰정보를 통해 바이오기업은 장기적으로 큰 혜택을 입는다. 회사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영진이 어렵게 채용한 구성원을 대상으로 한 작은 갑질이 연구의 품질을 무너뜨리고 상상력을 제한하고 때로는 경쟁사로 이직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신약개발 과정을 오케스트라에 비유한다. 오케스트라에선 개별 뮤지션의 최선을 다한 연주가 화음을 이루고 연주의 끝까지 흠결이 있어서는 인 되며 스텝과 관객을 포함한 구성원 모두가 소중한 역할을 한다. 신약개발에서 타깃발굴부터 전임상·임상단계를 거쳐 마케팅을 통해 환자에게 전해지는 것을 비교한 것이다.



여느 산업과 마찬가지로 바이오산업도 이른바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 시대다. 다양한 전문지식과 생각, 경험을 한 이질적인 집단이 모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시대다. 이질적인 전문가들의 관계에서 갈등의 양상은 다양하며 기술적 백그라운드가 다른 전문가로서 자존심과 본인 및 회사의 기술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때론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함인지를 생각해보고, 상대를 존중하고 진정한 파트너로 인정하는 자세가 절실하다. '돈 주면 갑이다'라는 단순한 갑을관계 생각으로 본인과 회사를 망가뜨리는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오늘 당장 변리사, CRO, CMO기관 담당자에게 연락해서 "너무 고맙다"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고, "사회적 거리두기만 완화되면 하루라도 빨리 생선구이백반이라도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하시라. 누가 알까. 오늘의 연락 한 통으로 수조 원짜리 신약기술 이전이 빨라지거나 생각지도 않은 장점을 발견하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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