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건 없다"…경단녀에서 여성 첫 본부장 되기까지

머니투데이 강민수 기자 2021.04.14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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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투업계 유리천장, 이대로 괜찮나]

편집자주 온 국민이 주식을 하는 시대다. 유례없는 '동학개미운동'으로 금융투자업계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됐다. 그러나 유독 개선이 느린 분야가 있다. 바로 유리천장이다. 여성 주식 투자자들은 대폭 늘었지만, 이들을 위한 여성 롤모델은 부족하다. 금융투자업계의 여성 직원 비율 증가에도 투자전문가로 불릴만한 증권업계 고위 임원은 대부분 남성이다. 금융권의 보수적인 분위기가 주 원인으로 꼽히지만, 국내 금융권은 해외와 비교해도 유독 여성 리더가 부족하다. 머니투데이는 금융투자업계 유리천장의 현주소와 최근 일고 있는 변화의 물결에 대해 조명해본다.

이상은 유안타증권 경영전략본부장이상은 유안타증권 경영전략본부장


"나도 했는데 왜 네가 못하니.

여성 후배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경력 단절을 이유로 시작을 두려워하는 여성들이 많다. 하지만 뭐든 늦은 시기는 없다고 생각한다."

영문과를 졸업해 삼성그룹 공채로 입사하며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정이 생겨 직장을 그만뒀고 이른바 '경단녀'(경력단절 여성)가 됐다.



당장 수입을 벌기 위해 영어 강사를 하려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평생 할 일인데 좀 더 길게 내다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력 단절 기간 동안 학업에 매진해 법학과에 학사 편입했고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로펌과 씨티은행 사내 변호사를 거쳐 유안타증권 IB(투자은행) 사업부문에 입사했고 최초 여성 임원이 됐다.



만 48세의 나이에 사내 첫 여성 임원에 임명된 이상은 유안타증권 경영전략본부장. 여성 인력이 유독 적다는 IB사업부문에 입사하며 증권업계에 입문한 그는 입사 8년 만에 임원으로 승진했다. 2008년 최선희 동양증권 이사를 제외하고 유안타그룹 편입 이후 첫 여성 임원이다.

많은 여성이 고민하는 경력 단절 기간 동안 오히려 전문성을 쌓아 커리어 전향을 꾀했다는 이 본부장. 머니투데이는 지난 1일 유안타증권 을지로 본사에서 이상은 유안타증권 경영전략본부장을 만나 금융투자업계의 유리천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다음은 이상은 유안타증권 경영전략본부장과의 일문일답.
이상은 유안타증권 경영전략본부장이상은 유안타증권 경영전략본부장
-간단한 약력 및 증권업계 입문 계기 소개를 부탁드린다.
▶연세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해 삼성전자 인사팀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개인 사정으로 오래 다니지는 못하고 그만두게 됐다.
경력 단절 기간 고려대 법학과에 학사 편입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로펌 입사 이후 금융권 변호사로 전문성을 갖춰보고 싶어 씨티은행 사내변호사로 이직했다.


6년여간 근무하면서 좀 더 역동적인 업무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때마침 유안타증권(당시 동양증권)에서 IB 딜 소싱부터 클로징까지 참여하는 변호사를 구한다는 소식에 2011년에 합류했다.

이후 거래관리(Transaction Management), 기업금융(Corporate Finance) 팀장 등을 거쳐 2014년 기획팀장으로 발령이 났고, 2019년 경영전략본부장으로 승진했다.

-해외 등과 비교하면 국내 증권업계의 여성 임원 비율은 유독 적은 편이다. 지난해 기준 10대 증권사의 여성 임원 비율은 5.14%에 불과했다. 개인적으로 무엇 때문이라고 보나.
▶여성들이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는 큰 차이가 없다. 아무래도 경력 단절 기간이 있는 경우가 문제다.

사실 이전만 해도 출산·육아 등을 이야기하면 눈치 주는 분위기가 있었다. 아이를 낳기 위해 쉰다고 하면 괜히 자리만 잡아먹고 다른 직원들이 근무량이 늘어난다는 부정적인 인식이다. 여성은 '결혼하면 그만둔다'는 고정관념도 한몫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인식이 바뀌는 추세다. 남성들도 '나도 딸이 있고 와이프가 있는데 이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회사에서도 직원들의 출산 및 육아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정책을 많이 시행 중이다. 남성 직원의 육아휴직도 늘고 있다. 유안타증권 전체 여성 직원 비율도 38%에 달한다.

-유안타증권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을 펼치고 있는지.
▶법적 난임 휴가가 유급휴가 1일인데 저희 회사에서는 3일 유급휴가를 주고 있다. 또 출산 이전에 본인 휴가기간을 모두 소진했다고 하더라도 필요하면 추가 출산휴가를 지급한다.

-조직 문화 등이 바뀌는데 외국계 증권사로 편입된 점도 영향이 있나.
▶아무래도 있긴 하다. 유안타그룹 본사와 소통할 때 보면 요직에 여자 부서장이 많더라. 오히려 남자 부서장을 찾기가 힘들어서 놀란 적이 있다.

유안타증권 임원 중 린훼이징 재무전략팀장도 여성이다. 확실히 여성 인재에 대한 한계나 제한이 없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제가 인사를 맡고 있는데 승진 등에 있어서도 여성이라고 한 번도 차별적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 오히려 여성 부서장급을 어떻게 키울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

이상은 유안타증권 경영전략본부장이상은 유안타증권 경영전략본부장
-여성 임원의 직무 편중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나. IB에는 적고, WM(자산관리) 등 리테일에는 쏠리는 현상이 있던데.
▶사실 IB 딜이 단기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서 신뢰를 바탕으로 딜이 나오는 건데 아무래도 동성끼리 교류하기가 부담이 없지 않겠나.

그러나 요즘에는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 IB에 아이 있는 기혼 여성도 상당수 있다. 다만 아직은 리테일사업 부문에 여성 비중이 높다 보니 부장급 여성도 본사보다 지점에 많은 점은 아쉽긴 하다.

-내년부터 자산 2조원 이상 상장사의 경우 특정 성으로 이사회를 구성할 수 없게 된다. 사실상 여성 이사 의무화 제도로 보이는데,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하다.
▶아무래도 저희 다음 세대부터는 여성 인재 풀이 훨씬 많을 테니 여성의 사회진출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라고 본다. 기업 운영의 투명성 강화 측면에서도 바람직하다.

하지만 특정 업종에서는 아직 적합한 여성 인재가 없을 수도 있지 않나. 이와 관련 유예사항은 없다 보니 구색맞추기 식으로 되면 안 하느니만 못하지 않을까 싶다. 주주와 고객, 직원 모두에게 만족을 줄 수 있어야 할 텐데 어떻게 실효성 있게 운영될지는 지켜봐야 할 듯 하다.

-올해 경영전략본부장으로서 삼는 목표가 있다면.
▶유안타증권이 외국 증권사의 한국 지사가 아니라 한국의 외국계 증권사이기 때문에 양쪽의 이점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해외 주식에 관한 관심이 늘어난 만큼 양질의 크로스보더 딜을 통해 리테일 고객도 참여할 방안을 고민 중이다. 최근에는 핀테크 분야에도 관심을 두고 새로운 먹거리 발굴을 위해 고심하고 있다.

-여성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제가 항상 후배들한테 하는 말이 있다. '나도 했는데 왜 네가 못하니'다. 아직도 경력 단절 때문에 고민하는 여성이 많더라. 많은 후배들이 경력 단절로 인한 재취업과 나이 때문에 시작을 못 하겠다고 고민한다.

그때마다 저는 '얼마나 네 나이가 젊은 나이인데, 그렇게 말하냐'고 반문한다. 제가 실질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이는 서른넷, 서른다섯이었다. 늦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고통의 시간이 길수록 달콤한 시간도 길다는 걸 생각하면서 좀 더 견디고 버텨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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