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에게 참 모진 세상[오동희의 思見]

머니투데이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2021.03.0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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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권 승계를 목적으로’라는 재료 하나로 참 오래 모질게도 몰아붙인다.

2000년 곽노현 당시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등 법학교수 43명이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저가 발행 관련 소송을 제기한 후 20년이 훌쩍 지났다.

2009년 대법원에서 무죄로 확정된 후에도 ‘불법 경영권 승계’라는 재료는 레시피만 달리 한 채 삼성을 압박하는 단골 메뉴가 됐다.



오는 11일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을 상대로 한 소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 재판이 재개된다.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5개월간 멈췄던 이 재판은 이 부회장이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확정선고로 지난 1월 18일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받고 재입소한 뒤 처음 열린다.



일부 이 부회장과 삼성에 비판적인 측은 국정농단 판결이 솜방망이 처벌이라며 미국이었다면 더 강력한 엄벌을 내렸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합병도 불법이 분명하다며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다.

그들의 주장처럼 미국이었다면 어땠을까.

미국이었다면 대통령이 무슨 재단을 만들라고 기업 총수들을 겁박해 돈을 내놓으라고도 하지 않았을 테고, 기업마다 체육단체장을 하나씩 맡아 승마를 육성하라느니, 동계스포츠를 강화하라느니도 하지 않았을 거다.


또 미국이었다면 대통령에게 경영권 승계를 부탁했다는 주장이나, 그로 인해 경영권을 승계했다는 말도 씨알이 먹히지 않았을 거다. 경영권은 그렇게 넘어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일례로 전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인 애플의 경영권 승계를 보자. 작고하기 전 지분이 거의 없었던 스티브 잡스가 ‘팀 쿡(지분 0.02%)을 신뢰한다’는 이메일 한 통으로 경영권 승계는 사실상 끝났다. 이사회의 절차는 형식에 불과했다.

경영권이 대통령이나, 지분의 많고 적음에서 오는 것이 아닌 시장에서 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한국이 미국보다 후진적인 가족경영 형태라고 주장하더라도 경영권은 검찰의 주장처럼 ‘대통령에게서 도움받아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LG 지분 6%를 갖고 있던 구광모 LG회장(현재 15%)이나, 현대차의 지분 2.35%를 갖는 정의선 현대기아차 그룹 회장도 지분으로 회장에 오른 게 아니다. 두산이나 LS의 형제 승계 등도 기업가문 가족 내의 결정과 시장의 신뢰가 핵심이다.

최근 경영권 분쟁에 휘말린 한진, 한국타이어, 금호석유화학 등도 가족 간 갈등이 원인이다.

고 이건희 회장의 3남매인 이재용, 이부진, 이서현 3인의 유대 관계에 따라 승계논란이 불거질 수 있을 뿐 2009년 에버랜드 무죄 선고 이후 경영권 승계 논란은 삼성 내에서 이미 사라진 것이었다.

미국은 지분이 없어도 팀 쿡이 경영권 승계를 할 수 있고, 우리는 지분율을 높여야만 이재용이 경영권을 승계할 수 있다는 주장은 어폐가 있다.

그런데 상장이나 합병 등 모든 경영행위 앞에 실체도 명확치 않은 ‘경영권 승계를 목적으로’라는 단서를 붙이니 죄가 된다.

미국에는 없는 사건들에 얽힌 이 부회장은 20년을 우려먹는 ‘경영권 불법승계’라는 덫으로 전직 대통령과 한 묶음으로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그 와중에 ‘경영권 승계를 목적으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한 자본시장법 등의 위반 혐의로 또 다른 재판 앞에 서게 됐다.

이 재판은 검찰 수사심의위원회에서 사건을 검토한 후 불기소 권고를 내린 것을 검찰이 무리하게 기소한 것이다. 이 부회장이 남은 1년 여의 수형생활을 끝내도 또 수년간 이 재판에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다.

기업가 가문에서 태어나 조부인 이병철 회장과 부친인 이건희 회장에게 뒤지지 않는 경영자가 되어보겠다던 그는 뜻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정치사건에 휘말려 수형생활과 재판으로 생을 보내게 됐다.

그가 자신의 자녀들에게는 이런 인생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경영권 승계’ 포기를 선언한 심정이 이해된다.

수형생활이 끝나고도 5년은 경영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라는 목소리가 높다. 환갑 전에는 삼성 그룹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요구다. 기업경영을 필생의 꿈이자 업으로 생각하고 살아온 그에게 세상은 참 모질다.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부국장)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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