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배 칼럼]생각은 반드시 답을 찾는다

머니투데이 김만배 부국장 2021.03.04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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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고수들'- 조훈현 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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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요한 생각의 결 안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천천히…. 거칠었던 호흡이 편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녜웨이핑도 보이지 않고 진행요원들도 사라졌다.
조바심도 초조함도, 심지어 이기고자 하는 욕망까지도 사라졌다.
바둑과 나, 단 둘만 남았다.
그 절대적인 고요의 순간,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래, 바로 여기구나!
멀리서 아득하게 10초를 세는 카운트다운이 들려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현실감각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일곱을 카운트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힘차게 돌을 놓았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쫓기던 내가 순식간에 주도권을 되찾았다.

조훈현 9단이 1989년 9월5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회 응창기배 결승 5국에서 녜웨이핑 9단에게 145수만에 불계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한 순간을 설명한 글이다.



바둑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제1회 응창기배 결승 5국 당시 조훈현 9단과 녜웨이핑 9단의 기보를 두고 토론을 벌인다고 한다.

서로 엎치락뒤치락 숨 막히는 혈전을 벌였으나 양쪽 모두에서 정말 보기 드문 어마어마한 수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특히 후반부에서 밀리고 있던 조 9단이 순식간에 살아날 수 있었던 129수에 대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이에 대해 조 9단은 "나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나는 그저 생각 속으로 들어갔을 뿐이다. 내가 답을 찾은 것이 아니라 생각이 답을 찾아낸 것이다"라고 말한다.

조 9단은 2015년 출간한 자신의 저서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에서 '생각의 법칙'은 무엇이고 '생각은 반드시 답을 찾는다'고 했다. 또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고독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


고독 속에 자신을 떨어뜨린 후 오랜 시간 외로운 싸움을 하라고 한다.

몇 년 전 기자는 이 책을 처음 접하면서, 조훈현 국수에 대해 깊은 흥미가 생겼다. 아니 흥미라기 보다는 존경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지난여름 우연히 조 9단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의 11살부터 시작된 일본 유학시절과 바둑 스승인 세고에 선생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들었다.

나는 더 이상 다른 질문을 하는 게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시대의 초극강 고수와 5시간 남짓 함께 걸으면서 바람에 실려온 들판의 이런저런 향기를 맡는 것으로 만족했다.

또 그가 생각의 터널을 산책하듯 해 떨어지는 들판을 걷는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웠다.

지금도 그 설렘과 감동이 생생하다.

국수는 말했다.

"19로 바둑판에서 구역들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반드시 연결되는데, 고수가 된다는 건 서서히 이 연결고리를 깨우치는 것이며 스스로 그 연결 고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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