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정주영, 이건희의 시대[광화문]

머니투데이 진상현 산업1부장 2021.02.0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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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봄 쯤이다. 정기적으로 모임을 함께 하고 있는 한 기업인이 새로운 사업 얘기를 꺼냈다. 이미 진행중인 시계 브랜드 론칭과 별개로 마스크 제조를 해보려 한다고 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마스크 품귀 현상이 벌어졌던 때다. 마스크 수급에도 도움을 주고, 돈도 될 것 같다고 했다. 그가 마스크 사업에 투자한 자금은 12억~15억 원 정도. 이 군자금으로 마스크 제조 장비를 4대 구입했고, 월 최대 250만~300만 장 생산 규모를 갖춘 공장을 차렸다. 몇 달도 안 돼 매달 수백 만 장의 마스크를 만들어내고, 일자리까지 창출해낸 것이다.

신기했다. 사실 사업 자금으로는 그리 크지 않은 금액이다. 서울 강남에 아파트 한 채 사기도 벅차다. 내가 저 정도 여윳 돈이 있었다면 한창 주가를 높이던 아파트 투자나 생각하지 않았을까. 새삼 기업인들이 대단해 보였다.



# 돈이 될 만한 사업을 찾는다. 투자를 하고 부가가치를 만들어낸다. 이윤을 내면 더 큰 투자를 한다.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국가 경제가 발전한다. 기업인들이 우리 사회에 기여하는 방식이다. 한국 경제도 이런 기업인들과 함께 성장했다.

구인회 LG 창업회장,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 정주영 현대 창업회장, 신격호 롯데 창업회장, 최종현 SK 창업회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등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창업 1세대들의 도전과 열정, 헌신으로 산업화의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다음 세대인 구자경 구본무 LG 회장, 이건희 삼성 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 등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은 세계 일류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세탁기 냉장고 TV 조선 자동차 반도체 휴대폰 등 수많은 메이드 인 코리아의 신화가 만들어졌다.



“나라가 없으면 삼성도 없다”(이병철) “이봐 해봤어?”(정주영)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김우중) “우리는 미래를 샀다”(최종현) “부끄러운 성공보다 좋은 실패를 택하겠다”(박두병)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이건희) 창업 1,2세대들이 쏟아낸 명언들에는 그 시절 우리 기업인들의 패기와 뚝심,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 재계는 이제 창업 1,2세대를 지나 3,4세대로 넘어왔다. 일찌감치 2세대 경영을 시작한 최태원 SK 회장을 제외하면 4대 그룹 총수 가운데 이재용 삼성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 회장이 3세대, LG 구광모 회장은 4세대 경영자다.

맏형 격인 최 회장이 61세, 이 부회장(53), 정 회장(51)은 50대 초반, 구 회장(43)은 40대 초반이다. 4대 그룹 밖으로 넓혀도 김승연 한화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한화솔루션 사장(38)은 지난해 37세의 나이로 사장으로 승진하며 경영 전면에 섰다. 조양호 회장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경영을 이어받은 조원태 대한항공 회장(46)도 40대 중반이다.


맨바닥에서 시작했던 창업세대에 비해 수월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이들 젊은 총수들은 AI(인공지능), 모빌리티, 친환경 등 급변하는 산업 생태계 변화에 적응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어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다.

과거보다 훨씬 커진 기업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기대도 충족시켜야 한다. 정치권은 '기업 규제 3법',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등 기업 경영에 영향을 줄 법안들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선대 경영자들이 기업을 성장 시키는 것 자체로 역할을 인정받았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속가능성과 분배, 상생에 대한 비전을 요구한다.

재계를 대표하는 대한상의 회장에 곧 취임할 최태원 회장의 행보에 관심이 더 쏠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 회장은 누구보다 기업의 사회적 가치 창출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해온 경영자이다. 최 회장이 제시할 기업의 사회적 역할과 상생의 해법이 우리 경제에 어떤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을지 기대된다.

더불어 이런 기업인들의 노력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분위기도 중요하다. 기업이 자유롭게 뛰고 능동적으로 변신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기업이 잘 돼야 일자리도, 상생도 있을 수 있다. 지나친 규제로 화답해선 안 된다. 그래선 새로운 정주영, 새로운 이건희를 만날 수 없다.

새로운 정주영, 이건희의 시대[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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