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준이 증명하는 '악역의 품격'

조이음(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0.12.10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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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트하우스' 서 절대악 연기로 인기 견인

사진제공=SBS사진제공=SBS


최근 한 배우의 20년 전 모습이 담긴 공연 팸플릿이 공개돼 온라인 커뮤니티가 들썩였다. 말간 얼굴에 담긴 근원을 알 수 없는 처연함이 느껴지는 사진에 “확신의 아이돌 상” “비주얼 센터 확정”이라는 찬사가 줄을 이었다. 무엇보다 많은 이들은 ‘분노 유발자’로 맹활약 중인 현재와 180도 다른 모습에 놀라움을 표했다. 20년 전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독일 군인’이었던 그의 지금은 최고의 로열 아파트로 칭송받는 헤라팰리스를 탄생시킨 뛰어난 건축가이자 절대악의 화신 주단태. SBS 월화드라마 ‘펜트하우스’(극본 김순옥, 연출 주동민)에서 가진 자의 추악한 이중성을 드러내는 명연기로 매해 최고 시청률을 경신 중인 배우 엄기준의 이야기다.

극중 엄기준이 연기하는 주단태는 건축뿐 아니라 부동산 투자에도 천부적 재능을 지닌 인물. 한 치의 흐트러짐이나 구설도 용납하지 않는 냉혈한이자 완벽주의자다. 자신이 만든 헤라팰리스 100층에서 재벌가 출신 아내, 쌍둥이 남매와 살고 있다.



여기까지 ‘흔한 드라마 속 다 가진 남자 주인공’이라면, 주단태에게는 ‘김순옥 월드’ 표 매운맛 서사가 더해진다. 주단태는 현재 아내 심수련(이지아)과는 쇼윈도 부부. 두 사람은 과거 정략결혼 예정이었지만 주단태는 심수련으로부터 갑작스럽게 파혼을 통보받는 치욕을 맛봤다. 절대악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으니 그 이후의 일은 예상대로다. 일생일대의 가장 큰 계획이 틀어진 완벽주의자 주단태의 상상 이상의 복수가 시작된 것. 먼저 사랑을 위해 숨어버린 심수련과 그의 정인을 찾아냈고, 만삭 상태인 심수련 앞에서 그의 정인을 무참하게 죽였다. 이후 아픈 아이를 출산한 심수련에게 손을 내밀어 가정을 이뤘으나 이는 표면적인 다정함일 뿐이었다. 그는 심수련의 친딸 민설아(조수민)를 신생아실에서 바꿔치기했고, 바뀐 딸 주혜인(나소예)의 목숨마저 앗아가려 했다. 또 이웃 여자(김소연)와의 선 넘은 관계를 이어가다 민설아에게 꼬리를 밟혔고, 이를 영원한 비밀로 만들기 위해 민설아를 죽음으로 내모는 데 일조했다. 여기에다 제 자식인 쌍둥이들에게 자신의 완벽의 잣대를 들이대며 폭행, 감금을 서슴지 않는다.

사진제공=SBS사진제공=SBS


선악 구도가 명확한 ‘김순옥 월드’ 속 주단태는 악의 축을 맡고 있다. 때문에 죄책감을 모르고 끝 모르는 악행을 이어간다. 눈 뗄 수 없이 벌어지는 사건 사고 어디에나 그가 연루돼 있고, 가끔 개연성 없는 억지스러운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20년 넘는 시간 동안 켜켜이 쌓은 엄기준의 견고한 연기와 만나 제대로 된 악의 서사를 구축한다. 특히 그의 하얀 피부와 얼굴에 담긴 예민함, 날카로운 눈빛과 캐릭터 완성을 위해 쓴다는 안경, 확실한 발음으로 몰아치는 대사까지, 완벽을 추구하는 주단태의 모습 그 자체다.

사실 드라마를 통해 만나는 엄기준 표 ‘소름 유발자’는 이제까지 많이 봐왔다. 그리 낯선 그림이 아니다. 2012년 방송된 SBS ‘유령’에서 엄기준은 냉철한 사업가 조현민이자 복수를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잔혹성을 지닌 살인마 팬텀으로 분해 충격을 선사했다. 2017년 방송된 SBS ‘피고인’에서는 재벌 2세 쌍둥이 형제 차선호·민호를 연기했다. 예의 바르고 겸손한 장남 선호와 그런 형에 대한 열등감으로 사이코패스가 된 민호. 여기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형을 죽이고 선호의 인생을 대신 살게 된 민호와 극 말미 자신의 선택이 잘못됐음을 깨닫고 피폐해지는 그의 복잡한 내면까지 선굵게 소화해냈다. 엄기준은 연기파답게 1인 2역을 넘어 1인 3역 이상을 무리 없이 소화했다. ‘골든크로스’ 속 절대 악 마이클 장(2014)과 ‘복면검사’ 속 강현웅(2015)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엄기준 발 악인이다.

1995년 연극 ‘리챠드3세’로 데뷔한 엄기준은 뮤지컬, 드라마, 영화까지 다양한 매체 연기를 모두 섭렵했다. 특히 2006년 단막극으로 첫 드라마를 경험한 그는 이후 매해 1편 이상의 드라마에 출연하면서도 평균 3편의 뮤지컬(또는 연극)을 소화했다. 이는 체력적으로 살인적인 스케줄은 차치하고서라도 매 작품, 배역에 대한 연기적 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정이다. 이 같은 열정적인 활동을 펼치며 꾸준히 자신의 이름을 빛낼 수 있었던 건 맡은 배역마다 완벽히 몰입해 펼쳐낸 그의 연기력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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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계에서는 다양한 작품에서 ‘티켓 파워’를 자랑하는 그이지만, 공연을 즐기지 않는 시청자들에게는 주로 ‘악역 배우’로 익숙해졌을 엄기준. ‘펜트하우스’ 속 주단태도 역시 악인이지만, 이를 통해 더 많은 이들이 엄기준에게 빠져드는 ‘엄며들’(엄기준+에 스며들다)이 되는 계기가 되었기에, 그의 연기가 더욱 반갑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쓴 2020년에도 ‘펜트하우스’와 함께 뮤지컬 세 작품, 연극 한 작품, 하나의 예능 프로그램까지 바쁘게 한 해를 보낸 엄기준. 내년에도 배우 엄기준의 워커홀릭 행보를 기대해본다. 어차피 ‘연기는 믿고 보는 배우’니까. 바람이라면, 오랜만에 ‘그들이 사는 세상’ 혹은 ‘여인의 향기’에서처럼 멜로 향이 더해진 캐릭터로 돌아오면 어떨까?

조이음(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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