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광의 디지털프리즘]유료방송 삼국지

머니투데이 성연광 정보미디어과학부장 2020.06.1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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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사진=게티이미지뱅크


#“무조건 45만원 드릴께요. 이참에 갈아 타세요.”

며칠 전 모 통신사 고객센터 직원이라며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초고속인터넷 서비스 가입을 권유한다. 계속 보던 케이블 TV가 있고 거기서 깔아준 와이파이 속도가 넉넉해 필요 없다고 했다. 실제 그랬다. 집안 식구들이 TV를 자주 보지도 PC 게임도 하지 않는다. 채널 수 많고 속도 짱짱한 IPTV(인터넷TV)나 기가인터넷으로 갈아탈 이유가 별로 없다. 또다시 3년 약정의 노예가 되긴 더더욱 싫었다.

영업사원의 설득은 집요했다. 결합할인 얘길 늘어놓더니 급기야 첫달에 현금을 주겠다고 했다. 요금 손실분을 다 보전하고도 이득이니 갈아타는 게 현명하다고 보챈다. 일단 “생각해 보겠다”고 끊었다. 고민거리가 아닌데 고민이 됐다. 썩 내키진 않지만 그런 제안을 받고도 케이블TV를 그대로 본다는 게 스스로 ‘호갱’처럼 느껴져서다.



# 유료방송 시장의 현 주소를 보는 듯했다. 케이블TV(SO) 시장 1, 2위 기업인 CJ헬로(현 LG헬로비전), 티브로드가 통신사에 넘어갔고, 딜라이브, 현대HCN, CMB 등 5대 SO 중 나머지 3곳도 모두 매물로 나왔다. 다채널 24시간 방송 시대 개막을 선포하며 1995년 화려하게 출범한 케이블TV 시대가 이렇게 저물고 있다. 방송통신 융합과 넷플릭스발 OTT(동영상스트리밍서비스) 혁명 등 급변하는 시장정세에 놀라 케이블TV 주주들이 너도나도 ‘손절매’에 나선 결과다.

케이블TV의 몰락은 수년 전부터 예고돼왔다. 이동전화와 초고속인터넷 결합상품을 무기로 가격 공세를 퍼붓는 통신사에 대적하기가 버거웠다. ‘방송통신 융합’을 기치로 탄생한 IPTV에 밀려 케이블TV 가입자 수는 2009년 최고치(1529만명)를 찍은 뒤 줄곧 내리막이다. 2017년 11월부터는 가입자 수가 IPTV에 밀리기 시작했다.



올해를 기점으로 국내 유료방송 시장은 KT, SK텔레콤, LG유플러스 등 통신 3사 위주로 완전히 재편됐다. 통신 3사 점유율이 이미 80%를 넘어섰다. 추가 인수합병(M&A)이 무위에 그친다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통신사들의 케이블TV 인수가 순탄했던 건 그들이 내세운 ‘넷플릭스 견제론’이 제대로 먹혔기 때문이다. 국내 시장을 위협하는 글로벌 OTT에 대항하기 위해선 국내 미디어 산업도 ‘규모의 경제’가 필요하고 시급하다는 논리였다. 4년 전 SK텔레콤-CJ헬로 인수를 막아섰던 규제 당국이 이번엔 아무런 딴지 없이 M&A를 허락했다.

# 통신사가 주도하는 유료방송 시장 개편이 국내 미디어 산업 경쟁력에 득(得)이 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넷플릭스 성공 이면엔 오리지널 콘텐츠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있다. 손쉬운 가입 해지 절차 등 소비자 편의 위주의 정책도 있다. 통신사들도 모를 리 없다. 케이블TV 인수를 전후로 콘텐츠 투자 계획과 장밋빛 청사진을 앞다퉈 발표한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현실은 ‘가입자 뺏기’ 경쟁에만 집착한다.

현장에선 여전히 IPTV는 통신 상품의 ‘번들’에 불과하다. 제공되는 콘텐츠가 ‘거기서 거기’ 다 보니 현금 마케팅 말고는 가입자를 늘릴 방도도 없다. 소비자들도 현금 뭉칫돈에 익숙하다. 콘텐츠 차별화보단 현금으로 가입자들을 늘려온 통신업계의 업보다.


케이블TV는 올드미디어로 전락했지만 게임, 바둑, 낚시 같은 장르 채널을 만들고 CJ ENM 같은 걸출한 콘텐츠 공룡을 배출했다. 지상파 방송과 대적해 경쟁력을 갖추려 했던 업계의 고민과 협업의 결과물이다. 만약 글로벌 OTT들과의 경쟁에서 통신사들이 콘텐츠가 아닌 ‘쩐의 전쟁’만 반복한다면 몇 년 후 그들 역시 케이블TV의 운명을 답습할 것이다. 충성고객을 ‘호갱’으로 만드는 서비스와 산업은 공멸을 부를 뿐이다. 소비자에게도 이로울 게 없다. 과연 누구를 위한 유료방송 재편인가. 통신사, 그리고 규제 당국이 곱씹어볼 문제다.

확인 전화가 온다. 손해 보는 것도 아닌데 현금을 받고 갈아탈까. 아니면 그냥 의리를 지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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