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밝은 시늉을 하다 사막이 되었다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2020.06.1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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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리호 시인 ‘기타와 바게트’

[시인의 집]밝은 시늉을 하다 사막이 되었다


2014년 ‘실천문학’ 제3회 오장환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리호(1969~ ) 시인은 첫 시집 ‘기타와 바게트’에 쓴 약력에서 “2020년 M2-9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데 아무도 그 행성을 가 본 이가 없다”고 했다. M2-9은 지구로부터 약 2100광년 떨어져 있는 행성상 성운으로, 나비의 날개 모양처럼 생겨 ‘나비 성운’이라 불린다.

어린 왕자가 소행성 B612에서 온 것처럼 리호 시인은 M2-9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2020년에 ‘기타와 바게트’라는 우주선을 타고 지구라는 낯선 별에 불시착했다. 따라서 이번 시집은 익숙한 것이라고는 하나 없는 지구에서의 생존기인 동시에 “어느 행성에서의// 신의 잠꼬대”(‘시인의 말’)인 셈이다. 참 엉뚱한 이력이 아닐 수 없다.



당황스러운 건 시도 마찬가지다. ‘돈키호테’·‘곰돌이 푸’·‘갈매기 조나단’과 같은 소설의 한 구절(내용)을 부제로 설정하고, 이를 ‘적도의 펭귄’이라는 연작시로 쓰는 독특한 방식을 구사한다. 또 “ㄱ_ ㄱㅇ ㄴㅇ ㅇㅎ/ 그녀의 금관은 루시퍼가 변장한 박쥐”(‘초성신공’)와 같이 초성 퀴즈를 내기도 하고, “문제1. 좋은 여행은 다음 중 무엇일까요”(이하 ‘기말고사’)처럼 문제를 내기고는 “정답은 ‘시인의 말’을 보”라 하고는 시집을 닫는다.

시집 해설을 쓴 황치복 문학평론가는 “비약과 단절이 심한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동서고금의 다양한 문화 현상에 대한 관심을 쫓아가다 보면 시인은 보헤미안이나 보보스족 같은 독특한 라이프스타일을 지닌 것 같다"고 했다. 한마디로 리호 시인의 상상력과 언어는 뜨겁게 달군 프라이팬 기름 위에 떨어진 물방울 같다. 프라이팬에 떨어지는 순간 사방으로 파파팍 튀는 물과 기름 같은.



마다가스카르에 가면

우리의 상식을 깨는 동물들이 참 많지
사막에서 사는 게의 이야기
둘 중 하난 죽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고 하면
누가 죽을까?
게를 너무 많이 잡아먹어서 게를 수없이 그린 이중섭처럼
사막게를 잡아먹고 홀로 남은 게는
그녀의 초상화를 그릴까 그의 누드화를 그릴까
아니면 전갈을 불러들여 볼까
보름달 면사포를 쓰고 혼인댄스 마친 암컷 전갈이 자른 수컷의 목은 무슨 색일까
새를 먹는 타이거피시는 어때?
아니지 유황 가스 속에 사는 새우는 뜨거운 명함을 팔 수 있을까
그도 아니면 심장까지 훤히 보이는 투명 개구리는 어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말야
상식을 깨는 일들이 참 많아
북극곰과 남극 펭귄의 만남이
가당키나 한 일인지는 신께 물어보자고


이따금 안개 뒤덮인 불면의 사막에서
북극곰의 손을 슬며시 잡고 잠든 펭귄이 있었다고 하니까

- ‘156페이지, 신의 잠꼬대 편’ 전문


먼저 시 ‘156페이지, 신의 잠꼬대 편’을 살펴보자. “마법사 오즈를 찾으러 가자/ 두뇌가 없는 허수아비, 심장이 없는 양철나무꾼/ 용기를 얻고 싶은 사자/ 나는 도로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적도의 펭귄 1”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시는 ‘오즈의 마법사’를 차용하고 있다. 적도에도, 사막을 횡단하는 훔볼트 펭귄이 살고 있지만, 시인이 생각하는 ‘적도의 펭귄’은 “우리의 상식을 깨는 동물”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타와 바게트’호는 지구 중에서도 적도에 불시착한 셈이다. 날개가 있음에도 날지 못하는 펭귄은 시인의 자화상이다. 이런 설정과 상상은 시집 전체에 적용된다.

어쩌면 시인은 기존질서를 해체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마다가스카르에 가면”이라는 전제조건은 현실세계이면서 가상세계다. 현실세계에 비상식적인 일들이 많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선 “상식을 깨는 동물들”로는 “사막에 사는 게”, “혼인댄스를 마”치고는 수컷의 목을 자르는 “암컷 전갈”, “새를 먹는 타이거피시”, “유황 가스 속에 사는 새우”, “심장까지 훤히 보이는 투명 개구리” 등이다.

이런 동물들이 실존한다는 점에서 인간(나)의 상식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북극곰과 남극 펭귄의 만남”은 불가능할까? “불면의 사막에서/ 북극곰의 손을 슬며시 잡고 잠든 펭귄” 이야기는 “신의 잠꼬대”일 뿐일까? 여기에는 또 다른 것이 숨어있다. 만약 북극곰이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라면, 아버지의 “손을 슬며시 잡고 잠든” 어린 시인이라면, “이야기꾼이었던 아버지”(이하 ‘다리 세 개 달린 탁자’)가 그리워 꿈속에서 만난다면. 그리고 “둘 중 하난 죽어야 하는 운명”에 관한 슬픈 시라면….

가로 그늘 사이로 사막이 걸어갔다

조산한 오아시스를 불순분자들이 어제라 이름 붙였다

달동네 생계목록을 적어 놓은 좀 슨 빙산은 일교차가 클 때마다 제 그림자를 떼어 먹었다

배고픈 기억이 가려울 땐 화이트가 필요하지

허름한 커피숍 그늘에게 모피코트를 벗어주고

카페모카 크림을 내일이라고 우겼던
최근 기록을 쿡 꽂아 마셨다

덮어쓴 파일처럼 오늘이 사라지는
열두 시에 서서 내일의 식단 목록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밝은 시늉을 하다 사막이 되었다

겁도 없이
괜찮다고 했다

- ‘인덱스’ 전문


아버지가 “그해 가을/ 웃자란 새벽 까마귀를 따라가”시고 난 후, 하혈을 하면서도 “압류딱지가 붙은 냉장고 속 음식으로 밥상”(‘천재지변’)을 차렸다. 세상은, 세상인심은 건조한 사막과도 같다. 오아시스 같은 날들은 과거의 일이 되었고, “달동네의 생계”는 혹독했다. 추울 땐 “제 그림자를 떼어 먹”었고, “배고픈 기억”은 “화이트”로 지우고 싶었다.

마음은 사막 같지만, 가난한 이에게 “모피코트를 벗어”줄 만큼 시인은 정이 넘친다. “오늘이 사라지는/ 밤 열두 시”, 환상의 세계는 사라지고 내일은 또 무엇을 먹을까 고민한다. 애써 힘들지 않은 척, 배고프지 않은 척 “밝은 시늉을 하다 사막이 되”고 만다. 마음이 더 황폐해진다. 뒤늦게 후회한다. “겁도 없이/ 괜찮다고 했다”고. 화려한 장식 속에 숨긴 고독이라고 할까. 혹은 깊은 상실과 결여의 위장술이라고 할까.

그럼에도 시인은 “웃는 방법”(‘건조한 악기’)을 찾는다. “당신의 몸에서” 나는 “첼로 소리”에 “모래알 하나하나 박힌 업이 모두 날아”(이후 ‘노아’)가고, “파묻힌 몸이 저절로 빠”진다. “이제 스스로 던진 죄를 용서”하고, “웃으며 오는 봄이 저만치 손 흔”든다.

[시인의 집]밝은 시늉을 하다 사막이 되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길 잃은 늑대가 우연히 발견한 전생

- ‘허들링의 황제들’ 전문


여는 시 ‘허들링의 황제들’은 쾌걸 조로가 쓴 검은 가면 같은 그림(M2-9 닮았다)과 “루브르 박물관에서 길 잃은 늑대가 우연히 발견한 전생”이라는 짧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 허들링은 남극에 사는 황제펭귄들이 혹독한 추위를 견디는 생존법이다. 황제펭귄들은 영하 40도 이하로 내려가면 서식지 중앙으로 모여 몰아치는 바람과 눈보라를 견딘다. 이들은 원을 만들어 서로 모여 있다가 안쪽에 서 있던 펭귄이 몸이 따뜻해지면 밖으로 나가고, 체온이 떨어진 바깥쪽의 펭귄이 안쪽으로 들어오며 다시 체온을 높인다.

죽을 만큼 추운 건 누구나 똑같다. 하지만 그들은 망설이지 않고 두 달간 순환하며 따뜻한 봄을 기다린다. 아주 공평하게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남극의 혹한을 견디는 황제펭귄의 삶은 감동이다. 시인은 황제펭귄의 허들링에서 문명사회 이전의 공동체를 발견한다. 종교나 이념, 문명을 초월한 인간성 회복. 슬픔·고독·결여·상처에도 매몰되지 않는 공동체 정신. 이것이 좌충우돌 지구여행자인 시인이 진정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타와 바게트=리호 지음. 문학수첩 펴냄. 190쪽/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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