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오늘만 아니라면 어디든 상관없다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2020.04.0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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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박은정 시인 ‘밤과 꿈의 뉘앙스’

[시인의 집] 오늘만 아니라면 어디든 상관없다


2011년 ‘시인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한 박은정(1975~ )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밤과 꿈의 뉘앙스’는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허무주의자의 슬픔을 담고 있다. 고향을 떠나 서울이라는 고독한 공간에 정착한 시인은 집과 일터의 쳇바퀴 같은 ‘사이’에 고립되어 있다. 집이 자발적 고립이라면 직장은 먹고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일탈 같지 않은 일탈이 술 한 잔 마시며 음악을 듣는 보헤미안적인 삶이다.

경계인이나 보헤미안 기질은 타고난 것도 있겠지만 “소중한 것들”(‘몸주’)을 잃고 난 후 이를 잊으려는 시도에 가깝다. “사랑을 하기엔 늙었고/ 이별을 다시 말하기엔 지쳤”(‘302호’)다는 현실인식은 시인을 절망케 한다. 시와 음악이 없었다면 시인은 진작 무너졌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시집은 “노래도 한숨도 아닌 낯섦 같은 것”(이하 ‘악력(握力)’)이면서 “그 낯섦 속에는 막 쓰기 시작한 잔혹사”라 할 수 있다.



시집 전체 분위기를 대변하는 여는 시 ‘영원 무렵’을 먼저 살펴보자. 사랑을 맹세할 때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다는 말”은 이미 “기억 속에서만” 남아 있다. 이별의 사유는 알 수 없으나 이후의 삶은 “색색의 알약”에 의지하며 힘겹게 버틴다. “다들 그렇게 사는 것 같”은데, 실상은“잃을 것도 없”는 심적으로 빈한한 삶이다. 가진 것이 없으니 “얻고 싶은 것도 없”다. 희망 없는 삶에서 선택지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파란 공이 울타리를 넘어
해변으로 굴러왔다



이것은 정체불명의 행성

사라져 가는 낙원을 지나
가늠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이국의 목소리들이
야자수를 향해 달려가는 동안


점박이 수영복을 입은 여자가
모래사장에 묻어 버린 말

라니아케아,
은하계를 유영하는 마음

어제의 기원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오늘의 걸음이 어디쯤에서 끝나는지

내일이면 기억나지 않을 얼굴과 인사를 나누며
우리는 빛의 신앙으로 걷는다

이곳의 속도는 인간의 눈으로 가늠할 수 없어
더욱 아름다운지도 몰라

무리를 벗어난 행성
해변을 가로지르는 무지개
검게 탄 피부와 흩어지는 웃음들

마음은 모래알처럼 사소하여
작은 과오도 놓치지 않는 짐승이다

오늘이 관측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세상의 미물이 사라지고 불가능한 행성이 도래하여 모두의 얼굴을 가릴 때까지

태양 아래 반짝이던 네가
파도 속에서 사라진다

라니아케아,
고향으로 돌아가기엔 늦은 시간

누구도 공을 찾으러 오지 않는다

지친 거북들이 모래사장을 기어 다닐 때
알 수 없는 빛이 그림자를 비출 뿐

- ‘라니아케아’ 전문


시 ‘라니아케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천문학 지식이 필요하다. 우주는 떠돌이별과 행성, 성간물질을 제외하고 다 중력에 묶여 있다. 태양계는 은하수은하에 속해 있다. 은하수은하·안드로메다은하·삼각형자리은하 3개를 중심으로 질량이 작은 왜소 은하들이 묶여 있는데 이를 ‘국부은하군’이라 한다. 은하군이 모여 은하단, 은하단이 모여 초은하단이 된다. 따라서 지구의 주소는 라니아케아초은하단, 처녀자리초은하단, 국부은하군, 은하수은하, 오리온자리 팔, 태양계, 지구가 된다.

이 시는 하와이어로 ‘호누’라는 푸른바다거북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하와이 라니아케아 비치가 배경이다. 라니아케아는 하와이 원주민어로 ‘측정할 수 없는 천국’이라는 뜻이다. 느닷없이 “울타리를 넘어” 굴러온 파란 공은 지구와 방황하는 자아를 상징한다. 라니아케아 비치에 있지만 “정체불명의 행성”이고, 들리는 목소리는 이국적이다. 경계인의 삶이 포착된다.

몸은 라니아케아 비치에 있지만 마음은 은하계에 머문다. 인간은 해안의 모래 한 알보다 못한 미미한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런 질문은 결국 종교로 귀결된다. 인(因)과 연(緣)은 중력처럼 서로 끌어당긴다. 문제는 떠돌이별과 같은 감정이다. 시인은 중력을 벗어난 떠돌이별의 고독에 침잠된다.

세상 밖은 빠른 속도로 돌아가고, “이곳의 속도는 인간의 눈으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느리게 흘러간다. “무리를 벗어”나 멜랑꼴리한 감상에 젖어든다. “작은 과오”가 더 크게 다가오는 시간이다. 문득 부끄러움에 “얼굴을 가”리고 싶어진다. 오늘이 영영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 “고향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만의 안온한 시간이다.

유리병 속에 목소리들

텅 빈 공중을 울리며 달아나고 있었지 불우한 이마를 유리 벽에 박으며. 무거운 피가 뚝뚝 떨어질 때까지

이곳에 남은 것은 지치고 늙은 성정들뿐

동전을 하나씩 흘리며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내는 동안
마음은 언제 헐릴지 모를 곳을 지난다

저 문을 열면 괘종시계가 있고 식탁이 있고
지금 여기에 없는 당신의 방이 있지

내가 죽으면 박제를 해 줘 슬픔도 기쁨도 없이 당신의 방에서 정적만을 먹고 살찌도록

낮과 밤을 잊고 헤매던 목소리와 담벼락에 얼굴을 묻고 울던 목소리, 기다리던 인기척에 지친 목소리들이 수신자 없는 안부를 전송한다

사람들이 손을 흔든다 떠나지 못하는 자들과 돌아오지 않는 자들 사이에서, 겨울은 지겹도록 계속되었다

주인 없는 문패를 내리고
찬바람 속으로 흩어지는 사람들

어두운 골목에서 십자가를 가리키던 당신은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을까

사라진 동전들의 흔적을 찾듯
눈을 들어 이미 없는 곳을 돌아보면 거기,

아무도 없는 유리병이 굴러간다

이곳에 물이 마르고 있어
산 사람의 이름에 빨간 줄을 그으며

- ‘수색(水色)’ 전문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시는 서울 은평구 수색재개발지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유리병 속의 목소리들”은 빈집에 들어서면 텅텅 울리는 공허한 발자국 소리의 시적 변용이다. “언제 헐릴지 모르는” 이곳에는 “지치고 늙은 성정”들만 “언제 헐릴지 모를” 동네를 지키고 있다. 사람들이 버리고 간 괘종시계나 식탁, “하나씩 흘”린 동전은 “불우한” 이웃들의 삶의 흔적이다.

재개발지구의 풍경은 을씨년스럽다. 집을 비우면 곧바로 대문을 잠그고 붉은색 페인트로 X자를 하고 차단막을 친다. 버리고 간 살림살이가 골목에 뒹군다. 먼저 떠난 사람들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미처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버림받은 기분이다. “찬바람 속으로 흩어지는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는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고 대부분은 살던 곳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내가 죽으면 박제를 해 줘 슬픔도 기쁨도 없이 당신의 방에서 정적만을 먹고 살찌도록”이라는 매혹적인 문장처럼 떠난 당신의 영혼까지 사랑하겠다는 사연이 소문처럼 떠돌아 그나마 다행이다. “눈을 들어” 바라본 하늘에선 “아무도 없는 유리병이 굴러”다닌다. 물 많은 동네, 수색에 “물이 마르고 있”다. 정든 동네를 떠나야 하는 사람들의 눈물이다. “산 사람의 이름에 붉은 줄”을 긋는 “이곳은 죽음보다 열악”하다.

세상 밖은 “세기말의 침묵”(‘불황의 춤’)에 잠겨 있고,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한 뼘의 경희’)조차 보이지 않는다. “오늘만 아니라면 어디든 상관없”(‘회전하는 불운’)는 시인은 “어젯밤엔 술잔을 던졌고/ 내일 밤엔 보들레르의 시를 읊으며/ 단골 바에서 울고 있을 예정이”(‘한 뼘의 경희’)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

시집을 덮으면 기형도 시인의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빈집’)라는 구절이 저절로 떠오른다.

◇ 밤과 꿈의 뉘앙스=박은정 지음/민음사 펴냄/180쪽/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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