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불시착'과 김정은의 배짱

머니투데이 뉴욕=이상배 특파원 2020.01.10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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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北 제재에도 불구하고 中관광객·내수 중심 버티기…'빅딜' 안 되면 '스몰딜'로 신뢰 쌓아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매일 아침 뉴욕 맨해튼 44번가와 2번 대로가 만나는 곳에 토요타의 미니밴 시에나 한대가 멈춰선다. 그리곤 북한 말씨를 쓰는 6∼7명이 차에서 내려 바삐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맨해튼 동쪽 루즈벨트섬에 모여사는 유엔주재 북한 대표부 직원들이 함께 출근하는 광경이다. 북한 대표부 직원들은 대부분 이 미니밴으로 함께 출퇴근하고, 별도 자가용으로 다니는 건 대사와 차석대사 뿐이다.



현직 유엔주재 북한 대표부의 수장으로서 북한측 '뉴욕채널'을 이끄는 김성 대사의 행보는 전임자들과는 사뭇 다르다. 과거 북한의 유엔대사들은 핵·미사일, 인권 등 대북제재와 관련된 유엔 회의들에만 참석했다. 그러나 김 대사는 UNDP(유엔개발계획)의 개발도상국 원조 회의를 비롯한 경제 관련 논의에도 자주 얼굴을 비친다.

북한의 정책기조 변화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김 대사가 유엔대사로 부임한 건 2018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핵-경제 병진' 노선에서 '경제건설 총력집중' 노선으로 공식 선회한 직후다.



북한 입장에선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 따르면 2016년 3.9%에 달했던 북한의 경제성장률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도한 대북제재 확대로 2017년 -3.5%까지 추락했다. 대북제재가 유지될 경우 악몽 같은 90년대 '고난의 행군'이 반복될지도 모를 판이었다.

제3차 남북 정상회담과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된 건 이런 배경에서다. 북한에 대한 '최대압박' 전략이 통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자화자찬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약 2년이 지난 지금, 북한의 사정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겉보기에 북한의 경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국제무역센터(ITC)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까지 북한의 대중국 무역적자는 16억5000만달러(약 1조9000억원)로 전년 대비 18% 늘며 사상 최대치로 악화됐다. 지난달엔 유엔 제재로 수만명의 해외 북한 노동자가 모두 송환되면서 무역외 분야에서도 외화벌이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북한에서 공식 통계는 큰 의미가 없다. 최근 급증한 중국인 관광객을 통한 이른바 '보따리 무역'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유엔 결의안의 대량현금 소지 관련 규정만 지키면 여행은 대북제재에서 사실상 자유롭다.

최근 중국에선 친북 정서가 강해지면서 북한 관광이 특수를 누리고 있다. 투먼-청진 철도 관광의 경우 호텔이 부족해 외국인 민박이 허용되고, 일부 중국인 관광객은 열차에서 숙박할 정도로 호황이라고 한다.

공식 교역이 막히면서 북한 경제는 내수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수출 금지에도 불구하고 북한내 금속 채굴은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김정은 집권 후 북한 전역의 장마당은 약 500개로 늘었다. 청진 수남시장은 서울 동대문시장의 약 2배에 달하는 규모다. 인기리에 방영 중인 TV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 그려진 활기찬 북한 장마당의 모습은 실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새해 벽두 김정은은 미국을 상대로 '새로운 전략무기'를 언급하며 '충격적인 실제 행동'을 경고했다. 미국이 굽히고 들어오기 전까지 제재 하에서도 버틸 수 있다는 자신감이 깔려있다. 트럼프의 대북 '최대압박' 전략은 사실상 실패한 셈이다. 중국이 대북 관광을 열어두는 한 북한의 숨통은 막히지 않는다.

김정은이 스스로 핵을 포기하리라 기대할 순 없다. 비핵화가 안 된다면 핵·미사일 개발 속도를 늦추는 게 차선이다. 다행히 김정은도 대화의 여지를 완전히 닫은 건 아니다. '빅딜'이 어렵다면 '스몰딜'로 조금씩 신뢰를 쌓아갈 수 밖에 없다. 경자년 북미 정상의 결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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