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발전 이끈 기업 비콥 인증…한국도 세계적 흐름 따라야"

머니투데이 이영민 기자 2020.01.07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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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새로운 10년 ESG]2-<2>평가기관 '비랩' 훌라한 공동설립자 인터뷰

편집자주 ESG(환경, 사회적책임, 지배구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ESG 친화기업에 투자하는 글로벌 자금은 30조 달러를 넘어섰고, 지원법을 도입하는 국가도 생겨났습니다. ESG는 성장정체에 직면한 한국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단이자 목적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2020 새로운 10년 ESG’ 연중기획 기획을 통해 한국형 자본주의의 새 길을 모색합니다.

-기업별 맞춤 평가 'BIA'
-주주 외 직원·지역사회 전반 이익공유 계량화
-업종·소재지 따라 다른 평가, 매년 업데이트
-전세계 71國 3100개 기업 금융거래 이자율 우대
-법제화된 '베네핏 코퍼레이션'
-주주반발 방지 위해 상법에 도입…美 27개주 채택
-세제 지원 없지만 정부 사업공모서 가산점 등 추진
-착한 기업들 경영 리스크 낮아…삼성·현대도 가능

바트 훌라한 비랩 공동설립자 / 사진=김휘선 기자 hwijpg@바트 훌라한 비랩 공동설립자 / 사진=김휘선 기자 hwijpg@


"각국 상법은 경영진이 주주의 이익을 무엇보다 중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과거형이다. 미국 36개 주는 주주뿐 아니라 직원, 지역사회, 환경 등 이해관계자 전반을 고려해야 한다고 법(베네핏 코퍼레이션)을 바꿨으며 영국과 프랑스, 칠레, 브라질도 관련 입법이 한창이다. 한국도 이제는 세계적 흐름에 따를 때가 됐다."



지난해 연말 국제 콘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처음 내한한 바트 훌라한 비랩(B Lab) 공동설립자는 서울 반포 메리어트호텔에서 이뤄진 머니투데이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비랩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수준을 평가하고 인증하는 비영리 기관이다. 사회적 의무를 다하고 있는 기업에게는 '비콥' 인증을 부여한다. 인증을 받은 기업들은 전세계 71개국, 3100개가 넘으며 이들은 사회적 존경을 받을 뿐 아니라 자금조달 등 금융거래에서 이자율을 낮게 적용받는 등 실질적인 이익도 누리고 있다.



훌라한 설립자가 비랩을 구상한 것은 1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유명 스포츠 의류회사 앤드원을 운영하던 그는 회사를 사회적 의무를 다해 존경받는 기업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는 "직원과 고객은 물론 협력업체, 지역사회에 보탬이 되는 기업을 만들고 싶다는 이상이 있었다"며 "그러나 회사가 커질수록 외부 투자자들이 늘어났고 이 때문에 주주의 이익을 먼저 챙겨달라는 의견에도 귀를 기울여야 했다"고 털어놨다.

이어 "결국 2005년 앤드원을 매각하고 어떻게 해야 기업을 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며 "고민의 결과물이 2006년에 설립된 비영리단체 비랩(B Lab)"이라고 설명했다.


출처=비콥 홈페이지출처=비콥 홈페이지
그는 "비랩은 우리가 자본주의 힘을 활용해 전세계의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즉 기업의 경제적인 이익 활동이 사회 발전으로도 이어질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앤드원의 공동창업자인 제이 코엔 길버트와 월스트리트에서 투자 경험이 있는 앤드류 캐소이와 함께 비랩을 설립해 행동에 나섰다. 비랩을 설립한 이들은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을 수치로 계량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과정이 쉽지 않았다. 다양한 기업들을 일률적인 기준으로 평가하는 작업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훌라한 설립자는 "예를 들어 인터넷기업에 비해 석유기업이 상대적으로 환경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전세계 석유사업을 중단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그래서 비랩은 기업이 각자 처한 환경에 맞춰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평가하는 BIA(B Impact Assessment)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BIA는 기업의 업종, 소재지 등에 따라 70가지 버전으로 나뉜다. BIA에서 200점 만점에 80점 이상을 받으면 일정의 확인 과정을 거쳐 사회적 의무를 다하고 있는 기업이라는 의미로 '비콥' 마크를 발행해준다. 비콥인증을 받은 유명 기업으로는 미국 아이스크림 회사 벤앤제리, 친환경 의류제품 업체 파타고니아, 유니레버, 더바디샵 등이 있다.

비콥 기업은 매년 회사에 대한 보고서를 공개해야 한다. 비랩은 3년 마다 비콥 기업들의 인증을 재평가하고 있다. 기간 중에도 소비자에게 잘못 된 정보를 줬다거나 하는 등 중대한 문제가 발견되면 인증을 박탈 당할 수 있다. 자체 평가는 무료지만, 인증은 비용을 내야 한다. 현재 비랩의 수익은 55%가 인증비용, 45%가 기부다.

훌라한 설립자는 "매년 일부 기업을 비콥에서 내보낸다"며 "기업이 정말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BIA도 8000개 기업으로부터 매년 피드백을 받아 개발을 거듭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BIA는 6번째 버전이 출시돼 있으며 7번째 버전을 개발 중이다.

바트 훌라한 비랩 공동설립자  / 사진=김휘선 기자 hwijpg@바트 훌라한 비랩 공동설립자 / 사진=김휘선 기자 hwijpg@
BIA는 인터넷에 무료로 공개돼 있어 누구나 자신의 회사를 쉽게 평가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회사의 금융 정보를 정직원들과 공유하는 공식적인 절차가 있는지 △업종 평균과 비교해 회사의 보상 체계가 어느 정도인지 △사업의 환경 평가가 어느 정도 범위 내에서 공식적으로 공유되고 있는지 등이다. 총 답변에는 약 1~3시간이 소요된다.

BIA에 응한 기업들의 점수는 얼마나 될까. 훌라한 설립자는 "수만개 기업들의 평균 점수는 50점에 불과하고 비콥 기업들의 평균 점수도 95점 수준"이라며 "65점에서 80점을 넘기는데 9년이 걸린 기업도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고 마음 먹더라도 실제 변화가 가시화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기업이 사회적인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바꾸자는 비콥의 활동은 미국의 상법이 바뀌는 계기가 됐다. 미국 상법은 주마다 다르지만 '주주이익 극대화'라는 기업의 설립목적은 공통된 내용이다.

경영자가 다소 비용이 들더라도 환경친화적인 제품을 개발하거나 지역사회에 기부를 한다고 하면, 주주들이 상법을 토대로 소송을 걸 가능성이 있었다. 때문에 비랩과 비콥 기업들은 주주 뿐 아니라 소비자, 노동자, 환경 등 모든 이해 관계자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베네핏 코퍼레이션(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이라는 법인격을 상법에 도입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합법적'으로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고려할 수 있는 길을 만든 것이다. 현재 베네핏 코퍼레이션 법은 2010년 메릴랜드를 시작으로 뉴욕, 캘리포니아, 델라웨어 등 미국 36개주에서 통과된 상태다. 특히 2013년에 미국 회사법의 고향인 델라웨어에서 통과된 점이 의미있다. 포춘지 500대 기업 중 75%의 본점이 델라웨어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 외에도 이탈리아, 콜롬비아, 캐나다에서도 통과됐다. 아시아에서는 아직 도입된 곳이 없다.

입법화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입법화 실패한 주도 있다. 훌라한 설립자는 "모든 이해관계자를 아우를 수 있는 논리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했다"며 "진보 진영에는 기후 변화, 빈곤퇴치,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고 설득하고, 보수 진영에는 자유시장경제의 가치를 증진하는 법이라고 설득했다"고 설명했다.

덕분에 베네핏 코퍼레이션 법이 통과한 미국 36개주 중 27개주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그는 "미국에서는 베네핏 코퍼레이션이라고 해서 세제 지원을 받지는 않지만 정부 사업 공모에서 가산점을 주자는 논의를 하고 있다"며 "이는 세제 혜택과 달리 특별히 정부 예산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베네핏 코퍼레이션법이 통과된 지역에서 일반 기업에서 베네핏 코퍼레이션으로 변경하려면 이사회와 주주총회를 거쳐 정관을 변경하면 된다.

"사회발전 이끈 기업 비콥 인증…한국도 세계적 흐름 따라야"
훌라한 설립자는 "주주를 설득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자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주주이익'이 최우선시되는 상황에서 '이해관계자'들과 이익을 공유하는 회사로 바꾸기 위해서는 회사 경영진 뿐 아니라 주주들과의 공감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그는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추구하면 경영 비용이 더 들 것이라는 회의적인 시각이 있지만, 이런 기업들이 시장의 변동성에 더 잘 대응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수익을 더 많이 창출한다는 분석이 많다"고 강조했다.

미국에는 베네핏 코퍼레이션이 제 역할을 다 하는지 감시하는 공식적인 기구는 없다. 다만 베네핏 코퍼레이션으로 바뀐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회사가 사회 전반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경영 선택을 했을때, 주주들이 회사가 목적을 따르지 않고 있다고 따질 수 있다.

베네핏 코퍼레이션이나 비랩인증은 ESG(환경, 사회적책임, 건전한 지배구조) 활동과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프랑스 유제품 기업인 다농은 2018년 2월, BNP파리바 등 금융기관들과 20억유로의 대출 이자를 ESG 실적에 연동해 적용키로 합의해 화제를 모았다. 다농의 비콥 인증 부서에서 일정 비율의 매출을 올리면, 이자가 저렴해지는 구조다.

다농은 세계적으로 플라스틱을 많이 소비하는 기업인데 비랩은 점차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도록 다농에 권유하고 있다. 다농 자회사들도 비콥 인증을 받는 중인데 2030년까지 모든 자회사의 인증을 목표로 하고 있다.

훌라한 설립자는 "금융기관들이 비콥 기업에 이러한 편의를 제공하는 이유는 착한 기업들이 경영 리스크가 낮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바트 훌라한 비랩 공동설립자 / 사진=김휘선 기자 hwijpg@바트 훌라한 비랩 공동설립자 / 사진=김휘선 기자 hwijpg@
그는 "공정무역 기업이라고 해서 친환경적이라고 단언할 수 없기 때문에 평가는 총괄적"이라며 "시작부터 높은 점수를 내려고 하기보다는 목표를 세우고 나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삼성, 현대 등 한국 대기업도 비콥 인증을 받을 수 있다"며 "특정 분야가 불리하더라도 다른 분야에서 긍정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훌라한 설립자는 "밀레니얼 세대 중 84%는 1년에 10만달러를 벌어도 의미 없는 곳에서 일하기보다는 4만달러를 벌면서 의미있는 곳에서 일을 하길 원한다"며 "이제는 한국에서도 기업경영과 사회적 발전이 균형을 잡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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