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이 내년 상반기 발행하기로 한 가상통화 '리브라'(Libra)가 전 세계 금융당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2009년 비트코인이 등장한 후 1,000여 종이 넘는 가상통화가 생성됐지만 아직 발행도 채 되지 않은 리브라만큼의 파급력을 가진 적은 없었다.
페이스북은 “규제당국과의 협의 및 승인 없이 독단적으로 추진하진 않겠다”며 한발 물러선 상황이다. 발행을 연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리브라는 어떤 구조이기에 화폐가 될까봐 세계 금융당국이 긴장하고 있는 것일까?
/사진=Libra
가상통화가 진짜 화폐처럼 쓰일 수 있을까. 지금까진 부정적인 전망이 대부분이었다. 화폐는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교환의 매개' △자산으로서 '가치의 저장' △물건 가격을 안정적으로 매기는 '가치의 척도' 등 세 가지 기능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비트코인 등을 볼 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가상통화 가격이 하루에도 큰 폭으로 급등락하면서 가치가 불안정하고, 소수의 사람들만 쓰기 때문에 보편적 신뢰를 얻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리브라가 설계된 구조를 보면 이런 문제를 상당부분 해결했다.
①낮은 변동성: 리브라는 가상통화가 가격 변동성 때문에 가치의 척도와 교환의 매개 기능이 어려운 점을 해결하기 위해 안정적 가치를 유지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이를 위한 세 가지 구조가 스테이블코인, 프라이빗 블록체인 그리고 준비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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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블(stable) 코인은 가치를 미 달러화 등 기축통화 등에 연동하고 있기 때문에 변동성을 크게 줄인 가상통화다. 비트코인처럼 수요와 공급, 채굴량에 따라 가격이 큰 폭으로 변동하지 않는다. 리브라는 달러, 엔, 유로와 같은 주요국 통화로 구성된 은행 예금이나 국채 등 안전자산 바스켓에 1대 1로 연동하도록 했다. 대부분의 스테이블코인처럼 단일 통화에 연동하는 것보다 안정성이 더 높다.
리브라가 구동되는 블록체인은 비트코인 같은 퍼블릭(개방형) 블록체인이 아니라 프라이빗(폐쇄형) 블록체인이다. 블록체인은 거래내역 등을 담은 블록을 체인으로 연결하는데 이때 앞뒤 블록을 검증하고 승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계약서 쓸 때 앞장과 뒷장에 간인 찍은 것과 같은 역할이다. 퍼블릭 블록체인은 참여자 누구나 검증과 승인에 참여할 수 있다. 이 작업을 채굴이라 하고, 엄청난 컴퓨팅 파워가 필요하기 때문에 보상으로 암호화폐가 주어진다. 반면 프라이빗 블록체인은 채굴과정 없이 제한된 참가자들의 합의를 통해 검증과 승인이 이뤄진다. 거래 속도와 낮은 수수료 등 블록체인 장점을 흡수하되 통제가 쉬운 중앙집권화 방식이다.
그래서 리브라는 비트코인과 달리 내재적 가치를 갖고 있다. 마치 과거 달러에 대해 금으로 바꿔주는 태환을 해줬던 것처럼 리브라도 태환을 해줄 수 있는 것이다. 가격이 폭락하면 디지털 조각이 되는 비트코인과는 다르다. 단, 분산화된 진정한 블록체인이 아니라는 비판을 감안해 페이스북은 리브라 출시 5년 후 퍼블릭 블록체인으로 전환할 계획이다.
페이스북과 그 계열사만으로도 거대 플랫폼인데 여기에 비자, 마스터카드, 이베이 등 리브라 협회 회원들의 플랫폼까지 더해진다. 아직까지 참가사들이 어떤 방식으로 참여할지 정해지지 않았지만 이들은 리브라 결제 시스템을 공유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우버나 리프트 요금을 낼 때, 이베이에서 물건 살 때, 부킹홀딩스(옛 프라이스라인)에서 호텔 예약할 때, 스포티파이에서 음악 들을 때 카드 대신 리브라로 결제하는 식이다. 온오프라인을 아우르는 리브라 경제 생태계가 구축되는 것이다. 페이스북은 출시 전까지 100개 회원사를 모집할 계획이다.
실제 이렇게 된다면 가상통화가 화폐가 될 수 없다는 논리는 무너지는 셈이다. 비록 자세한 메커니즘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안정적 가치를 유지하도록 설계됐고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면서 보편적 신뢰를 얻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리브라가 상용화할 경우 금융서비스는 더 쉽고 편리해질 수 있다. 은행이나 카드사 등을 거치지 않고 P2P(개인 간 거래) 방식으로 거래가 이뤄지기 때문에 송금 및 결제 수수료 등의 금융비용을 거의 제로로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금융 인프라가 취약한 곳에 거주하는 17억 금융소외계층이 누리게 될 혜택이 크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전 세계 금융시스템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전 세계 금융당국이 긴장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①금융 안정성 저해: 리브라는 신흥국 통화보다 높은 안정성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신흥국에 금융위기가 발생하면 리브라로 대규모 자금유출이 발생하면서 위기를 심화할 수 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신속하게 리브라로 옮겨 탈 수 있고 금융당국은 이를 제재할 수단이 없다.
②통화 정책 무력화: 각국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을 사실상 무력화할 수도 있다. 리브라가 널리 사용되면서 현금 수요가 감소하면 금리를 통한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효과가 약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통화정책뿐 아니라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의 조합, 외환정책까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중앙은행의 발권력이 위력을 상실할 수 있다.
③데이터 독점: 페이스북이 소셜데이터에 금융 데이터까지 더한 독점기업이 될 거라는 우려도 있다. 페이스북은 협회 일원일 뿐이고 금융 데이터를 수집하지도 않는다고 하지만 리브라가 가장 많이 사용될 플랫폼은 페이스북이기 때문이다. 특히 페이스북은 자회사 ‘칼리브라’를 통해 가상통화 지갑 등의 금융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인데 이 경우 페이스북 플랫폼 밖의 거래 데이터도 수집할 수 있다.
④자금 세탁: 범죄 악용 문제도 있다. 리브라 등 가상통화는 당국이 감시를 할 수 있는 은행 등 중개기관을 통한 거래가 아니라 P2P 방식이기 때문에 자금세탁이나 테러단체 자금조달 등에 악용될 수 있다. 페이스북은 리브라를 법정화폐로 현금화할 때 발생하는 데이터를 규제당국이 열어볼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지만 이보다 더 엄격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이 금융당국 지적이다.
16일(현지시간) 미국 상원 금융서비스위원회 청문회에 참석한 데이비드 마커스 페이스북 부사장. /AFPBBNews=뉴스1
리브라가 예정대로 내년 상반기에 출시될 지, 규제당국에 의해 설계가 어떻게 변경이 될지 아직 알 수 없다. 출시가 된다면 리브라는 기존 화폐전쟁 구도를 흔들 가능성이 높다. 달러 대 위안의 구도를 넘어 각국 통화 대 가상통화, 강한 규제를 받는 가상통화 대 비트코인 같은 무국적 가상통화의 대결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