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리포트]"철강 10兆 쇼크, VAR 판독하듯 다뤘다"

머니투데이 안정준 기자 2019.07.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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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상행정에 멍든 철강]①성분 분석없이 오염물질 규정…업계와 숙의 없이 초고속 결정

편집자주 지방자치단체의 고로(용광로) '조업정지 10일' 결정이 철강업계를 뒤흔들었다. 최대 10조원 규모의 손실로 이어질뻔 했던 이번 결정은 해외에서도 전례를 찾을 수 없는 '탁상행정'의 전형으로 평가된다. 사건 발생 과정을 되짚으며 무엇이 문제였는지 점검해 본다.

현대제철 당진 제철소 전경현대제철 당진 제철소 전경


현대제철에 고로(용광로) 조업정지 10일 행정처분이 확정된 지 한 달이 흘렀다. 9일 중앙행정심판위원회가 현대제철의 행정처분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여 당장 고로가 멈춰 설 위기는 모면했다.

위원회는 이날 정부세종청사에서 본회의를 열어 "제철소 공정 특성상 조업이 중단될 경우 입을 중대한 손해를 예방해야 할 필요성이 긴급하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오는 15일부터 10일간 내려질 예정이었던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고로 조업정지 행정처분은 보류됐다.



하지만, 최대 10조원의 손실이 예상됐던 이번 사안은 오염물질 분석과 업계와의 소통 절차가 생략된 채 진행된 탁상행정의 결과물로 평가된다.

◇환경단체 고발에서 조업정지까지 1달도 안 걸려 =사건이 출발점은 '영상물 촬영'이었다. 지난 2월 한 시민이 전라남도 포스코 광양제철소 고로에서 배출되는 연기를 촬영했다. 환경단체는 이 영상물을 지방자치단체에 대기환경오염물질 불법 배출 증거라며 건넸다. 환경부는 철강업계가 대기환경보전법을 위반했다고 유권 해석했고, 지자체는 포스코에 조업정지 10일 행정처분을 사전통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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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광양에서 발생한 불씨는 포스코 포항 제철소와 현대제철 당진 제철소로 옮아붙었다. 경상북도가 포항 제철소에 조업정지 10일을 사전통지했고, 충청남도는 당진 제철소에 행정처분 사전 통지 후 청문 절차 없이 바로 조업정지 10일을 확정했다. 환경단체의 고발부터 행정처분 사전 통지 및 확정까지는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사상 초유의 사태에 놀란 철강업계는 최대 10조원 규모의 손실이 불가피하다며 호소하고 나섰다. 한국철강협회에 따르면, 1개 고로가 10일간 가동을 멈출 경우 복구에만 3개월이 걸린다. 철강 120만톤, 금액으로 환산하면 8000억원의 손실이 발생한다. 조업정지 대상 고로는 3개여서 2조원이 넘는 손실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현재 국내에는 총 12개의 고로가 운영 중인데, 안전밸브와 가스 배출 구조는 모두 같다. 만약 3개 고로에 조업정지 조치가 내려지면 나머지 9개 고로 역시 같이 조업정지가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모든 고로가 10일 조업정지를 받으면 약 10조원의 피해가 발생하는 셈이다. 철강을 사용하는 자동차, 조선, 가전 등이 받게 될 연쇄 피해까지 감안하면 국가 산업 전체가 흔들리는 결정이다.

때마침 터진 제철소 정전사고는 고로 가동이 중단될 경우 발생할 막대한 피해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지난 1일 포스코 광양제철소에서 발생한 정전으로 5개 고로 가동이 일시 중단됐다. 가동중단이 5일을 넘어설 경우 '조업정지 10일'과 맞먹는 피해가 우려됐는데, 다행히 하루 만에 재가동했고, 손실 규모는 40억원에 그쳤다.


◇"오염물질 분석도, 업계와 소통도 없었다"=철강업계는 고로 가동중단이라는 극단적 조치가 내려지는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대기오염물질에 대한 분석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A철강사 관계자는 "결과적으로 고로에서 나오는 연기를 촬영한 영상과 사진을 근거로 조업정지 10일 예고와 결정이 내려졌다"고 주장했다. 환경부 유권해석이 고로에서 배출된 연기를 '오염물질'로 규정한데 따른 것인데, 이 연기의 구성 성분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한 조사가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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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는 고로 연기 대부분이 수증기라는 입장이다. 함께 배출되는 잔류가스도 2000cc 승용차가 하루 8시간 운행시 10여 일간 배출하는 양에 불과하다고밝혔다. 한 철강회사 관계자는 "축구장에서 비디오판독(VAR) 하듯 10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손실 우려가 있는 문제를 다룬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조업 중단으로 피해를 입는 철강업계와 제대로 된 소통 없이 결정이 이뤄졌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고로에서 연기가 새어 나온 안전밸브 '블리더'(bleeder)에 대한 이해부족이 대표적이다.

블리더는 공정에 이상이 발생하면 고로 폭발을 막기 위해 가스를 배출하는 폭발방지 안전시설이다. 고로 정비 중에 폭발을 예방하려면 블리더를 개방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현대제철 등 철강업계의 공통된 입장이다. 정비 시 블리더 개방은 전 세계에서 이뤄지는 고로 안전 절차고, 다른 대체기술이 없다는 것은 업계에서 상식으로 통한다.

실제로 블리더 개방을 인정하지 않은 정부와 지자체의 판단은 해외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한국의 고로 가동 중단 위기를 전하며 현지 철강업계 관계자 말을 인용해 "우리도 같은 방법으로 블리더를 개방하지만 법령 위반이 아니라 문제가 된 적도 없다"고 보도했다.

업계는 정부와 지자체가 철강사들과 이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했다면 조업중단 조치는 내려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환경부는 최근 철강업계, 지자체, 전문가가 함께 참여하는 민관협의체를 구성하고 8월까지 개선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B철강사 관계자는 "뒤늦게 민관협의체를 마련한 것 자체가 정부가 업계와의 진지한 소통이 없었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한 것 아니겠냐"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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