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떼면 물가 폭발? '리디노미네이션' 겪은 국가들 어땠나

머니투데이 백지수 기자 2019.05.16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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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300][런치리포트-리디노미네이션 공론화]②터키 등 성공사례…베네수엘라 등 정정 불안 속 '폭망'한 국가도

'0' 떼면 물가 폭발? '리디노미네이션' 겪은 국가들 어땠나


‘13,817,503,500,000,000’

이 17자리 숫자가 2017년 말 대한민국의 국민순자산 규모다. 1경817조5035억원으로 경단위다.

리디노미네이션(화폐 액면 비율 변경)이 등장할 때면 종종 제시되는 숫자다.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화폐의 자릿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자 업무 처리나 금융거래 등에서 비효율이 발생한다는 사례다. ‘0’만 떼 내 단위수를 줄이는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리디노미네이션 찬성론의 주장이다.



한국에선 다소 생소한 개념이지만 리디노미네이션 경험국은 여럿이다. 2005년 이후 14년 10여개국에서 한 차례 이상 리디노미네이션을 시행했다. 이들은 대부분 제3세계 국가이긴 하지만 프랑스나 러시아 등 유럽 국가들도 그보다 이전에 리디노미네이션을 했다. 일본에서도 여론 수렴에 실패해 실제 시행으로 이어지진 못했지만 입법 논의 등이 이뤄지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선 찬반이 엇갈린다. 커피전문점 메뉴판 등 이미 실생활에선 자체 리디노미네이션이 이뤄진 측면이 있다. 반면 여론이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물가 폭등, 화폐 가치 평가 절하 등 우려가 나온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도 지난 3월 국회에서 “리디노미네이션 논의를 할 때가 됐다고 생각은 한다”면서도 “그러나 장점 못지않게 단점도 따르기 때문에 논의를 하더라도 조심스럽게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총재 말처럼 실제 외국에서도 리디노미네이션에 성공한 국가들도 있지만 실패한 국가들도 상당히 많다. 물가 폭등이나 경제성장률 하락을 겪은 나라들도 부지기수다.

2008년과 2018년 각각 1000대 1, 10만대 1 비율로 리디노미네이션을 시행한 베네수엘라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오히려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겪다가 최근에는 국가 경제가 디폴트(채무불이행)에 이를 정도로 악화되기에 이르렀다. 2008년 리디노미네이션 때는 경제성장률이 9.6%에서 오히려 0.2%로 떨어졌다 마이너스까지 기록했다.

다만 국가마다 정치·경제적 상황이 모두 달라 리디노미네이션 실패 사례를 두고 역기능만 바라볼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나온다. 베네수엘라의 경우 불안한 정치 상황도 복합적으로 경제 악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정치적 불안정성 때문에 정부가 치밀한 준비 없이 급하게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했다는 점이 리디노미네이션 실패의 근본 원인이었다는 설명이다.


다만 주요 리디노미네이션 실시국 중 경제규모가 큰 편인 터키 등의 성공 사례를 봐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터키의 경우 1994년과 2001년 두 차례 외환위기를 겪고 리라화 가치가 폭락하자 2005년 1월1일부로 화폐 단위를 기존의 100만분의 1로 낮추는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했다.

터키는 리디노미네이션 속도가 2015년까지 신·구 화폐 교환이 가능하도록 비교적 점진적이었다. 공공부문 개혁과 은행 시스템 개선 등이 병행된 리디노미네이션의 결과는 경제 성장이었다. 매년 50%에 육박했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6~10%대 한자리수로 감소했고 경제성장률도 2004~2007년 사이 평균 7%의 고성장세를 기록했다.

임동춘 국회 입법조사처 금융공정거래팀장은 머니투데이 더300(the300)과 통화에서 “국가별로 분석할 필요가 있겠지만 하이퍼 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이 너무 심한 가운데 리디노미네이션이 추진되면 실패의 위험성이 높다”며 “이 때문에 리디노미네이션을 하기 위해서는 주도면밀한 계획과 사람들의 인식에 합일된 생각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임 팀장은 또 “리디노미네이션을 주로 시행한 나라들 중 선진국이 별로 많지 않았던 점을 보면 실패 사례들은 어려운 정치 상황 등 속에서 면밀함이 부족한 점도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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