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남자들│① 억울한 남자, 비명을 지르는 여자

김리은 ize 기자 2019.04.16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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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BBC


인터넷에는 두 개의 세계가 있다. 피해자가 되기를 두려워하는 여자들의 세계와, 가해자가 되기를 두려워하는 남성들의 세계. ‘버닝썬 게이트’에 연루된 남성 연예인들이 단톡방을 통해 저지른 온갖 범죄들은 여성들에게 자신도 이런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성범죄자들은 괴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고, 마치 평범한 일상처럼 성범죄를 저질렀다. 반면 남성들에게 이 사건의 의미는 달랐다. 정준영 등이 포함된 단톡방에서 가수 로이킴이 음란물 유포 혐의로 경찰에서 조사를 받은 지난 4월 10일, 대형 포털을 비롯해 남성들이 주로 이용하는 각종 커뮤니티에서 그를 옹호하는 게시물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들은 승리와 정준영의 성매매 알선 및 불법 촬영은 명백한 성범죄로 인정하면서도 로이킴의 음란물 유포죄에 대해 “사진 한 장 올린 거 가지고 그랬음 대한민국 남자들 다잡혀 들어가겠다”, “친구끼리 ‘야짤(‘야한 짤방’의 줄임말)’ 정도는 공유할 수 있지 않느냐”라고 공감을 표했다.

지난 1월 17일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8년 디지털 성범죄 지원센터 운영 성과’에 따르면 불법촬영 피해자의 88.5%, 유포물 피해자의 93.3%가 여성이었다. 이번 남자 연예인들의 범죄 이전에도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이 여성들에 대한 불법 촬영물을 수익 모델로 삼은 ‘웹하드 카르텔’이 드러나기도 했다. 여성들은 화장실이나 지하철 등 일상 공간에 불법 촬영 카메라가 숨겨져 있다는 공포를 견뎌야 하고, 남성과의 관계에서 신체를 촬영 당하거나 사진이 웹에 유포될 수 있는 위험에 놓인다. 하지만 인터넷 커뮤니티의 남성들은 오히려 그들이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로이킴이 조사를 받은 뒤, 일부 남성 커뮤니티에는 여성 연예인들이 남성 연예인들에게 스킨십을 시도하는 방송 화면을 캡처한 게시물들이 업로드됐다. “여자였으면 (로이킴의 범죄가) 문제가 안 됐을 것”, “같은 행동을 해도 항상 남성만 가해자가 된다”라는 억울함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여성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성범죄에 대해 남녀 똑같이 단속하자’는 주장으로도 이어졌다. 성범죄는 남녀 구분없이 피해자가 될 수 있고, 그러니 남자만 주의하거나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한국은 여성의 평생 성폭력 피해율이 21.3%일 때, 남성의 피해율은 1.12%에 그치는 사회다(2018년 ‘한국여성의전화’). 앞서 인용된 ‘2018년 디지털 성범죄 지원센터 운영 성과’에서도 여성의 사진 합성과 공공장소 불법 촬영 피해가 각각 997건, 655건에 달하는 반면 남성은 해당 항목에서 관련 피해가 단 1건도 나타나지 않았다. 남녀 모두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논리는 피해자의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현실을 호도한다. 여기에는 그들이 억울하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실사판 빅 브라더”, “여기에 쇠고랑 차실 분들 한가득” 남자 연예인들이 저지른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여성가족부와 경찰이 5월 31일까지 스마트폰 오픈채팅방의 불법 촬영물을 집중 단속한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의 댓글 중 일부다. 개인 채팅방이 아닌 오픈채팅방 단속은 검열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일부 남성들은 이것이 남성들에 대한 검열이고, 자신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것이라며 분노한다. 그들의 머릿속에 여성가족부는 개인의 채팅방까지 마음대로 검열할 수 있는 초법적인 권력기관이다. 여성이 이미 실제로 수없이 벌어진 일들로 인해 공포를 느낀다면, 매우 낮은 가능성이지만 그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이유로 분노하고 억울해 한다.

지난 4월 6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정미례 성매매 문제해결을 위한 전국연대 공동대표는 2004년 성매매특별법에 성매매 알선자를 처벌하는 ‘노르딕 모델’이 도입되지 못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노르딕 모델을 도입하면) 한국 남성들 거의 대다수가 다 성매매하고 이럴 텐데 그럼 모든 남성들을 다 범죄자화하자는 것이냐? (그래서 도입하지 못했다)” 이날 방송에 앞서 ‘그것이 알고 싶다’가 ‘웹하드 카르텔’을 다룰 당시에도 불법 촬영 영상을 본 남자들을 처벌할 수 없는 이유 또한 영상을 본 남자들이 너무 많아서 그들을 다 처벌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사진 한 장 올린 거 가지고 그랬음 대한민국 남자들 다 잡혀 들어가겠다”라는 말을 하는 남성은 자신이 억울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처벌을 피해간 것뿐일 수도 있다. 너무 많은 남자들이 같은 행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정준영을 비롯한 남자 연예인들의 단톡방 내용을 사건을 최초 보도한 SBS funE의 강경윤 기자는 4월 13일 스브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정준영 채팅방’의 멤버들이 한 여성을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비난하면서 “위안부 급이다”라고 발언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역사적 피해자인 위안부를 성적 비하의 의미로 언급하는 행동은 역사에 대한 무지의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여성에 대한 왜곡된 성 인식에서 비롯된다. 지난 4월 13일 BBC코리아에서 공개한 ‘정준영 채팅방’의 대화 내용에는 여성을 음식에 비유하거나, ‘성기에서 냄새가 날 것 같다’는 발언을 유희로 삼는 내용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여성의 신체를 성적 대상화하는 왜곡된 시선은 여성에게 성범죄를 저지르고, 정준영과 그의 친구들처럼 그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공유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2019년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에서 제작한 ‘한국 사이버성폭력 대응을 위한 기본서’에 따르면, 자신의 신체 촬영물로 협박당하는 여성은 ‘공포’나 ‘위협’과 같은 감정을 주로 느끼고 생존과 관련된 압박감을 토로했다. 반면 일부 남성들은 자신의 신체가 촬영된 ‘몸캠’을 모자이크 처리 없이 그대로 업로드하거나 이를 자랑할 수 있었다. 여성과 남성의 신체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결국 전자를 약자의 위치에 놓고, 성범죄의 대상이 될 가능성을 높인다. 범죄의 경중에 따른 평가나 특정인에 대한 옹호가 아니라, 여성을 남성들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잘못된 성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한 이유다. 그래도 이들은 억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여성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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