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으로 생로병사 '비밀의 문' 연다

머니투데이 김지산 기자 2019.02.27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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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내미생물은 제2 DNA, 신체·정신 건강 좌우

'똥'으로 생로병사 '비밀의 문' 연다


10여년 전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지휘자 강마에(김명민 분)는 툭하면 상대를 향해 '똥덩어리'라고 모욕했다.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는 극단적 경멸의 표현이다.

세상에서 가장 원초적이고 더러운 것으로 치부되던 '똥'은 오늘날 과학계가 분석해야 할 하나의 우주다. 똥의 40%를 차지하는 장내 미생물에서 과학자들은 인간을 해석한다. 여기에서 그 사람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상태를 읽는다. 잘하면 수명도 예측할 수 있다.



말하자면 똥은 그 사람의 축소판이고 추적 가능한 인생지도다.

◇제2 DNA, 인간을 지배하는 장내 미생물 = 사람 몸 안에서 사는 미생물은 사람 세포보다 10배 많다. 유전자로 치면 사람 유전자보다 미생물 유전자 총합(마이크로바이옴)이 100배다. 미생물 총 무게는 1.3~2.3kg으로 추정된다.



장은 미생물들의 군락지다. 큰 창자에 세균 수가 4000종에 이른다는 학계 보고도 있다. 장 속에서 미생물들은 비타민을 만들기도 하고 사람이 소화하기 힘든 종류의 탄수화물이나 단백질을 대신 소화해주기도 한다.

사람이 음식에서 얻는 에너지의 10~15%는 장 내 박테리아가 소화한 것에서 얻는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세균은 양분을 먹고 증식한다. 그리고 장 속에서 똥을 눈다. 미생물 똥에서 나온 유기산을 사람은 에너지원으로 쓴다.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때도 있다. 장내 미생물 카테고리는 '펄미큐티스'와 '박테로이테티스'로 나뉘는 데 이중 펄미큐티스가 비만과 관련 있다. 비만 생쥐에게는 특히 펄미큐티스 박테리아가 많은데 정상 생쥐 장에 펄미큐티스 박테리아를 넣었더니 생쥐가 비만이 됐다. 소화가 잘 안된는 음식을 펄미큐티스가 잘게 부숴 당과 지방산으로 바꾸는 데 이게 소장으로 흡수돼 비만을 유도했다. 장 내 펄미큐티스 양을 조절하면 살을 뺄 수 있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장내 미생물들이 어떤 부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장 건강, 더 나아가 각종 암을 유발하거나 피부·대사, 심지어 정신질환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잇따른다.

◇'장내 미생물 지도' 국가간 경쟁 = 학계는 인간이 장내 미생물 환경을 지배할 수만 있다면 단순히 질병을 치료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건강에 관한 근본적인 페러다임을 바꿀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국내 최고 미생물 전문가인 정현호 메디톡스 대표는 "이를테면 장수하는 사람들의 공통분모 미생물을 찾아내 약으로 만든다면 전반적인 인간 수명이 연장될 수 있는 것"이라며 "세계적으로 이제 막 연구가 시작된 단계"라고 말했다.

미생물이 '생로병사'의 비밀에 접근할 또 하나의 길로 인식되자 세계 각국의 연구 경쟁이 치열하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이 이끄는 '인체 마이크로바이옴 프로젝트(HMP)'와 유럽의 '인간 장내 메타게놈 프로젝트(MetaHIT)'가 대표적이다. 중국은 '중국인의 인체 마이크로바이옴 프로젝트(C-HMP)'를 추진 중이다.

한국도 경쟁 대열에 합류했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은 지난 2016년 말 '한국인 장내 표준 마이크로바이옴 뱅크(KGMB)' 사업에 나섰다. 건강한 한국인의 장내 마이크로바이옴을 분석하고 데이터베이스화 하는 게 목표다. 2023년까지 80억원이 투입된다.

이정숙 생명공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마이크로바이옴 뱅크에서 미생물 자원을 확보하면 이를 활용해 한국인 주요 질환과 연관성을 분석하고 맞춤형 치료법을 제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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