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Eat]보헤미안 랩소디 불리던 그곳이 사라진다

머니투데이 강기준 기자 2019.02.03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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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인싸'되는 '먹는(Eat)' 이야기]
영국·프랑스 명물 펍·노천카페 줄줄이 폐업…
넷플릭스·배달음식 등 '방콕족' 증가가 원인

/AFPBBNews=뉴스1/AFPBBNews=뉴스1


1970년 영국의 어느 펍. 툭 튀어나온 앞니에 피부색부터 관객과는 확연히 다른 난민 출신 청년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시작한 노래는 어디가 불편한지 뚝뚝 끊기기 일쑤입니다. 결국 청년은 무언가 답답한지 마이크를 거치대에서 뽑아 들었고, 물 만난 고기처럼 무대를 휘젓기 시작합니다. 관객들의 의구심 가득했던 시선은 환호성 가득한 무대로 뒤바뀌었습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주인공이자 영국 전설의 락밴드 퀸(QUEEN)의 보컬리스트 프레디 머큐리가 처음 공연을 펼친 장면입니다.

영국에서 펍은 이렇게 스타를 꿈꾸며 무대에 오르는 밴드의 음악소리가 매일 울려퍼지는 곳으로, 또 퇴근 후나 주말에는 사람들이 어울려 맥주 마시며 축구 경기를 보는 교류의 장으로 자리매김해왔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또다른 프레디 머큐리를 꿈꾸는 이들이 부르는 노랫소리도, 시끌벅적하게 응원가를 부르는 이들의 모습도 볼 수 없을지 모릅니다. 영국의 상징인 펍이 줄줄이 문을 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말 기준 영국내 펍 숫자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10년 동안 1만1000여곳 줄었습니다. 5만여곳 중 22%가량이 문을 닫고 3만9000여곳만이 남은 것입니다.



펍 전체 시장을 놓고 보면 수치만큼 현실에서 체감할 만한 차이가 있는 건 아닙니다. 영국엔 한해 4000만명의 관광객이 방문해 성지순례하듯 펍을 방문하고 있고, 이런 수요가 넘치는 대도심에서는 펍 숫자가 오히려 늘어나고 대형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존을 걱정하는 펍들은, 도심지에서 벗어난 곳에 있는 이들입니다. 도심 외곽에 위치한 펍들은 일부 지역에선 10년새 절반이나 줄어드는 등 하루하루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사진=Flickr./사진=Flickr.
영국 내에서도 자연스레 소규모 펍의 멸종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정부가 나서서 대책을 내놓으라며 관련 협회에선 연일 압박하고 있습니다. 영국인들이 펍을 본격적으로 외면하기 시작한 건 2008년 금융위기 때입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며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은 탓도 있지만 앞서 2007년 시행된 실내금연 법의 영향이 컸습니다. 수많은 흡연자들은 펍에 갈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고민 끝에 펍들은 가게에 파는 음식의 질과 종류를 높여 손님들을 유인하겠다고 나섰는데, 오히려 인건비와 각종 부대비용만 늘어나면서 영세한 소규모 펍들을 중심으로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경제매체 CNBC는 여기에 넷플릭스 같은 스트리밍업체가 성장하면서 영국인들의 생활패턴이 바뀐 것도 한몫 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영국인들이 퇴근 후 펍에 가기보다는 맥주를 사들고 집에서 넷플릭스를 보는 '방콕족'으로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넷플릭스 영국 가입자수는 지난해 3분기 전년 대비 220만명(30%) 증가한 970만명을 기록했습니다. 2014년 3분기 영국 넷플릭스 가입자수(300만명)와 비교하면 4년새 3배 이상 증가하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로는 금주 캠페인인 '드라이 재뉴어리(Dry January)'가 지목됩니다. 1월 한달간 금주를 하자는 이 캠페인은 최근 몇년 새 인지도가 크게 높아지더니 올해는 420만명이 서명에 동참할 정도로 인기입니다. 가뜩이나 고군분투하는 펍들이 1월 한달은 통째로 장사를 접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영국에서 펍이 사라지고 있다면 이웃나라 프랑스에선 노천카페가 걱정거리입니다.

'노인과 바다'의 어니스트 헤밍웨이, '위대한 개츠비'의 피츠제럴드가 사랑했던 프랑스 노천카페 역시 현지인들의 생활 방식 변화라는 시대적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도태되고 있는 것 입니다.

프랜차이즈를 꺼려하던 프랑스인들은 현지화 전략에 성공한 맥도날드, 스타벅스 같은 곳을 찾기 시작했고, 음식 배달 서비스도 보편화되면서 더 이상 친구나 가족들과 둘러앉아 2~3시간씩 천천히 식사를 즐기는 프랑스 고유의 문화를 즐기지 않고 있습니다.

/AFPBBNews=뉴스1/AFPBBNews=뉴스1
실제 프랑스 파리의 노천카페 수는 매년 줄고 있습니다. 프랑스 통계청에 따르면 2014년부터 지난해 상반기까지 파리 시내 노천카페 300여곳 이상이 폐업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30여년 전만 해도 파리 레스토랑의 절반은 노천카페가 차지했는데 이제는 이 비중이 14%(약 5600개)에 불과합니다.

프랑스인들 역시 이제는 밖에서 사먹기보다는 집에서 배달시키기를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파리 등에는 4~5개의 음식배달업체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중 독일의 푸도라는 2015년 파리에 진출해 매년 20~40%씩 주문이 늘고 있고, 2016년 파리에 입성한 우버이츠는 2년 새 매출이 2배나 증가하는 등 폭발적 성장세입니다.

과거 미국의 스포츠용품업체 나이키는 경쟁 상대로 일본 게임회사 닌텐도를 꼽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닌텐도 게임기를 잡고 집에서 나오지 않으면서 나이키의 운동화와 운동복 판매가 영향을 받는다는 이유였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명물들도 이 같은 새 경쟁자들을 만나 고전하고 있습니다. 영국(4000만명)과 프랑스(9000만명)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한해 1억3000만명에 달합니다. 여전히 유명 관광지의 펍이나 노천카페는 이 덕분에 불황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펍과 노천카페를 외면하는 현지인들이 계속 늘어나고 관광객들만 북적인다면, 먼 훗날 '명물'이라는 명성마저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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