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다르듯 '뇌'도 다 달라…'신경다양성' 화두 던진 늦깎이 과학소설가

머니투데이 배영윤 기자 2019.02.03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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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제3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가작 길상효 작가…"내 경험에 '과학' 더한 'SF 입문서' 쓸래요"

'제3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에서 소설 '소년시절'로 가작에 당선된 길상효 작가. /사진=김창현 기자'제3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에서 소설 '소년시절'로 가작에 당선된 길상효 작가. /사진=김창현 기자


"사람들이 생김새가 다르듯 각기 다른 '뇌'를 갖고 태어나죠. 인종 차별, 성차별 등 오래된 갈등이 존재하지만 저는 이번 소설을 통해 저마다 다르게 타고난 인격인 '신경 다양성'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어요. 다른 뇌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 서로 다른 가치관, 서로 다른 존재임을 인정하자는 거죠."

'제3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 가작을 수상한 길상효(49) 작가의 작품 '소년시절'은 이번 수상작들 가운데 비교적 덜 SF적이다. 공상과학소설에서 '공상'을 뺀 '과학소설'이란 수식어가 더 어울린다.



길 작가 역시 "공모전 이름에 'SF'가 들어갔다면 선뜻 도전 못 했을 것"이라며 "'과학문학상'이라는 말에 용기를 냈고, 내 안에 있던 이야기들을 과학적 소재와 연결 지어 써내려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소년시절'에는 우주를 꿈꿨지만 고등학교 지구과학 교사가 된 주인공과 그의 동창인 천재 뇌과학자, 의문의 과거를 지닌 소년 등 서로 다른 뇌를 지닌 이들이 나온다. 사이코패스와 외계인의 뇌라는 설정을 통해 '신경 다양성'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자 했다.



평소 뇌과학 도서와 관련 기사를 즐겨 읽던 길 작가는 2023년 완성을 목표로 스위스에서 실제로 진행 중인 '인간 뇌지도 완성' 프로젝트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길 작가는 "폭주하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과연 인류 전체가 동의한 꿈인지 질문하고 싶었다"며 "학교를 배경으로 왕따나 학교 폭력 등의 문제도 다루고자 했다"고 말했다.

'제3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에서 소설 '소년시절'로 가작에 당선된 길상효 작가. /사진=김창현 기자'제3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에서 소설 '소년시절'로 가작에 당선된 길상효 작가. /사진=김창현 기자
이번 작품은 길 작가의 첫 번째 소설인데 심사위원들은 하나같이 '필력이 좋다'고 호평했다. 심사위원 김보영 작가는 '소년시절'에 대해 "아이들의 글을 심사하는 선생님의 시선으로 왕따와 학교폭력을 장르적으로 풀어낸 소설"이라며 "아이들이 체험하는 소외감을 외계인이라는 소재에 빗대어 보여준 좋은 작품"이라 평했다. 심사위원 정소연 작가는 "비슷한 소재의 응모작 중에 단연 눈에 띄었다"며 "지금 한국의 작가가 쓸 수 있고, 독자들이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모범적인 글"이라고 했다.

여러 권의 어린이 그림책을 냈지만 그 보다 긴 호흡의 소설을 정식으로 집필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오래전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돼 청소년 드라마 '공룡 선생' 극본 집필에 참여했고, 해외 그림책과 청소년 소설 번역 활동을 꾸준히 한 것이 '필력'의 원천일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길 작가는 "고등학교 방송반 시절, 시험기간도 예외 없이 원고를 써야 했다"며 "눈물 없이는 받을 수 없었던 선배 언니들의 무서운 첨삭 아래 힘들게 써내려갔던 글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온 것 같다"고 미소지었다.

남들에겐 어렵기만 한 과학이 길 작가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어려서는 동화보다 생활도감과 어린이 과학도서를 많이 읽었고 인형보다 공룡을 좋아했다. 대학에선 세라믹공학을 전공했다. 남동생도 남편도 공대 출신이다. 대학생 아들까지 공대에 진학한 공학도 집안이다.

사실 길 작가는 중학생 때 인생영화 'E.T.'를 만나면서 영화인의 꿈을 키웠다. 집안 반대로 영화학도 대신 공학도가 됐지만 졸업 후 영화학 석사를 수료할 정도로 영화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고 영화 시나리오, 드라마 극본 등 다양한 글쓰기를 이어갔다.

결혼과 출산으로 일시정지됐던 글쓰기는 아이와 그림책을 함께 읽으며 재생 버튼이 눌렸다. 그림책 작가로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골목이 데려다 줄 거예요', '최고 빵집 아저씨는 치마를 입어요', '점동아, 어디 가니?' 등 일상의 소재를 차별화된 시선으로 풀어낸 그림책들로 주목받았다.

'제3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에서 소설 '소년시절'로 가작에 당선된 길상효 작가. /사진=김창현 기자'제3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에서 소설 '소년시절'로 가작에 당선된 길상효 작가. /사진=김창현 기자
이번 당선 이후 달라진 것 중 하나가 그동안 주변에서 온통 그림책 소재로만 여겨왔던 것들이 SF 소재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길 작가는 "심지어 그림책용으로 써놨던 글도 SF로 발전시킬 수 있겠더라"고 말했다.

"비과학, 미신, 유사과학 등도 과학 범주에 있다고 봐요. 학문적으로 봤을 때는 틀렸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기엔 이 세상 자체가 과학으로 돌아가고 있거든요. 그러니 과학과 비과학을 포함한 모든 게 과학의 영역이고, 미신 같은 비과학 소재도 다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늦깎이 과학소설 작가지만 주부, 엄마, 학부모로 살아온 시간만큼 자신 안에 차곡차곡 쌓아온 이야기들을 남들과 다른 시선으로 풀어낼 수 있을 거란 자신감도 붙었다. 길 작가는 "100년 뒤 대입제도를 그려보거나 미래의 육아는 어떤 모습일지 등 나의 경험을 다르게 쓰려 했던 소재들을 SF로 전환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전공했던 신소재 분야나 영화, 야구 등 제가 좋아하는 것들에서 글감을 찾을 거 같아요. 그림책과 번역 작업도 꾸준히 할 겁니다. 저 역시 이제 막 SF를 공부하기 시작한 만큼, 이 장르를 낯설어하는 독자들에게 장르의 중심부에 다가갈 수 있게 돕는 'SF 입문서' 같은 작품을 쓰고 싶어요. 미래 또는 지구 밖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결국엔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써 나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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