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말 국정감사에서 한 의원이 증인으로 나온 보험사 직원을 질타하며 한 말이다. 암으로 고통받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환자에게 암의 직접치료냐, 간접치료냐를 따져가며 보험금 지급을 거절해서야 되겠느냐는 지적이다. 가슴으로 들으면 이 의원의 비판은 백번이고 만번이고 옳다. 하지만 차가운 머리로 들으면 이 의원의 논리엔 빠진 대목이 있다. 암에 걸리지 않아 보험금을 청구하지 않은 다른 수많은 암보험 가입자들에 대한 고려다.
보험사는 사람들이 암에 걸릴 확률과 암 치료시 드는 비용을 과거 통계로 추산해 보험료를 책정한다. 약관은 소비자가 낸 보험료로 보상이 되는 비용을 설명해놓은 것이다. 보험사가 보험금 지급 요청이 들어왔을 때 보험금을 지급할지, 말지 심사하는 것도 보험료에 반영된 질병 치료나 손실 복구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환자가 달라는 대로 보험금을 다 주면 어떻게 될까. 기존 보험료로 감당이 안돼 보험료를 올릴 수밖에 없다. 이는 보험금을 한 번도 청구하지 않은 다른 보험 가입자들에게 부담으로 전가된다. 보험 소비자보호를 논할 때 대상은 거의 언제나 보험금을 청구한 보험 가입자로 한정되고 주제는 대부분 보험금을 왜 주지 않느냐는 것이다. 보험금을 청구하지 않은 다른 보험 가입자를 보호하기 위해 보험금 지급을 거절해야 할 때도 있다는 점은 늘 간과된다.
금융감독원도 앞으로 요양병원 입원은 특약으로 분리해 따로 보험료를 내고 가입하도록 했는데 이는 기존 암보험료에 요양병원 입원비가 반영되지 않았다고 인정한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기존 암보험에선 보험논리보다 요양병원 입원 환자들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강조해 가능한 요양병원 입원비를 지급하는 방향으로 가이드라인을 정했다.
보험은 상호부조의 정신에서 출발했다. 사람들이 돈을 모아 누군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쓰게 하자는게 보험의 기본정신이다. 그런데 누군가 미리 약속한 어려운 일이 아닐 때도 돈을 쓴다면 다른 사람들이 내야 할 돈이 늘어나는 건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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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 상호부조의 정신이 보험이란 이름으로 금융화하면서 보험금이 여러 사람들이 낸 보험료로 조성된다는 점이 간과되고 보험사 이익에서 나온다고만 생각하게 됐다는 점이다. 이 결과 위험에 대비해 보험료를 냈는데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아 보험금을 못 받으면 보험사 배만 불린 것처럼 억울해지고 기회만 되면 가능한 많은 보험금을 타내려 애쓰게 된다.
금감원에 보험 민원이 가장 많은 것도 이런 보험의 구조 때문이다. 보험금은 안 타면 손해라는 생각, 보험금은 공돈이라는 생각이 극대화하면 보험사기가 된다. 금감원에 따르면 올 상반기 보험사기 적발금액은 4000억원으로 상반기 기준 사상최대를 기록했다. 적발되지 않은 보험사기까지 감안하면 올 상반기 보험사기만 1조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보험금을 못 받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소비자만 소비자가 아니다. 보험금을 청구하지 않고 침묵하는 소비자도 소비자다. 앞으로는 금융당국과 정치권이 침묵하는 다수 보험 소비자들의 보호에도 눈길을 주길 바란다. 이를 위해선 미히르 데사이 하버드경영·법학대학원 교수가 ‘금융의 모험’에서 지적했듯 역선택과 함께 보험의 2대 리스크인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기 위한 방안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도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려는 보험사의 조치는 부도덕한 것으로 비난만 하니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