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판 신데렐라’ 장희빈이 악녀로 몰린 진짜 이유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2018.11.17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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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96 – 장희빈 : 전무후무한 궁녀 출신 왕비

‘조선판 신데렐라’ 장희빈이 악녀로 몰린 진짜 이유


장희빈은 한국 사극에 등장하는 역사인물 가운데 가장 논쟁이 뜨거운 여인이다. 논쟁적인 인물은 진면목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녀는 조선 숙종 재위기에 펼쳐진 격렬한 당쟁의 한복판에 있었다.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린다. 특히 서인, 그 가운데서도 노론은 장희빈을 희대의 악녀로 몰았다. 그들의 큰 스승 송시열이 장희빈의 왕비 책봉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장희빈은 정말 희대의 악녀였을까, 아니면 억울한 희생양이었을까? 골치 아프게 얽히고설킨 당쟁을 걷어내고 인간적으로 살펴보면 의외의 진실이 엿보인다.



‘희빈(禧嬪)’ 장씨의 본명은 ‘옥정(玉貞)’이라고 한다. ‘희빈’은 장씨가 받은 후궁의 직첩이다. ‘옥정’이라는 이름은 민진원이 쓴 ‘단암만록’에 나온다. 조선시대 여성의 본명은 기록이 별로 없어서 알기 어렵거나 낭설이 분분하다. 하지만 장희빈의 이름은 출처가 분명하고 비교적 믿을 만하다. 이 기록을 남긴 민진원이 인현왕후의 오빠였기 때문이다.

장옥정은 ‘조선판 신데렐라’였다. 궁녀 출신으로 유일무이하게 왕비가 되었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는 (그녀로 인해) 금지된 일이었다. 그것은 ‘백마 탄 임금’ 숙종이 사랑했던 여인에게 베푼 한때의 특전이었다.



1674년 14세의 나이로 즉위한 숙종은 20대로 접어들며 두 살 연상의 대비전 나인 장옥정에게 푹 빠진다. 1680년 인경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계비 인현왕후가 입궁할 때까지 반년 사이에 왕은 자의대비에게 문안 다니며 찍어둔 옥정과 진하게 연애했다. 장옥정은 이 때문에 숙종의 어머니 현열대비의 미움을 사 궁에서 쫓겨났지만 1686년 돌아온다.

“장씨를 숙원(淑媛)으로 삼았다. 나인으로 뽑혀 궁에 들어왔는데 얼굴이 아름다웠다. 어느 날 임금이 희롱하려 하자 장씨가 달아나 내전에 뛰어들었다. ‘제발 나를 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는데 이는 인현왕후의 기색을 살피고자 함이었다. 중전이 시키는 일에 공손하지 않아 종아리를 때리게 하니 장씨가 원한과 독을 품었다.” (‘숙종실록’ 1686년 12월 10일)

장옥정에게 후궁 첩지를 내린 실록의 기사다.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눈에 띈다. 우선 그녀는 예뻤다. 조선은 외모보다 심성을 중시하는 유교국가였다. 실록에도 외모 언급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얼굴이 아름다웠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숙종이 홀딱 반할만한 미모가 아니었을까.


다음으로 애정행각을 보자. 임금과 옥정이 나 잡아봐라, 하면서 추격전(?)을 벌인다. 무슨 해변도 아니고 궁에서 이게 무슨 짓인가. 심지어 장옥정은 무엄하게도 인현왕후에게 달려가 수작을 건다. 숙종은 사랑에 눈이 멀었고, 옥정은 눈에 뵈는 게 없었고, 왕비는 눈 뜨고 보기 힘들었다. 이 미친 사랑은 파국으로 이어졌다.

후궁 장옥정은 1688년 10월 왕자를 출산했다. 28살의 청년군주는 크게 기뻐했다. 내심 후사를 걱정하던 숙종이었다. 그 시절에는 임금이 그 나이가 되도록 후계자를 얻지 못하면 나라의 걱정거리로 간주했다. 그런데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그것도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얻었으니 얼마나 기분 좋았을까.

이듬해 1월 숙종은 중대발표를 했다. 새로 태어난 왕자를 ‘원자(元子)’로 삼겠다는 것. 원자는 상속권, 즉 왕위계승권을 가진 임금의 맏아들을 뜻한다. 조선시대 왕의 장자는 통상 2~3살에 원자가 되고, 7~8살에 세자로 봉해져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그런데 태어난 지 두어 달밖에 안 된 갓난아기를, 그것도 궁녀 출신 후궁의 소생을 원자로 삼겠다니.

신하들은 만류했다. 중전의 나이가 한창인데 뭐 그리 급하냐, 혹시 적장자(본부인의 맏아들)가 나오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운운. 그러나 임금은 무시하고 밀어붙였다. 발표한 대로 갓난아기를 원자로 정하고, 어머니 장옥정을 희빈(정1품)에 봉한 것이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니, 서막에 불과했다. 숙종은 곧 대대적인 정계개편에 들어갔다. 정권을 잡은 신하들을 물갈이하고 끝까지 반대한 원로대신은 유배 보낸 뒤에 죽였다. 빈자리는 반대파로 채웠다. 숙종의 주특기, 전가의 보도, ‘환국(換局)’이었다.

1689년의 ‘기사환국(己巳換局)’은 본심을 꺼내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얼마 후 숙종은 새 신하들 앞에서 느닷없이 중전의 투기를 거론했다. 얘기인 즉은 장희빈이 궁에 돌아와 후궁이 되었을 때 인현왕후가 돌아가신 부왕과 대비를 들먹이면서 헐뜯었다는 것이다.

“중전이 꿈에 선왕(현종)과 선후(현열대비)를 만났다면서 ‘숙원은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궁에 두면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부인의 투기는 옛날부터 있었지만 어찌 선왕과 선후의 말을 거짓으로 꾸며 임금을 놀라게 하는가. 두 분이 숙원은 아들이 없다고 했다는데 그럼 원자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숙종실록’ 1689년 4월 21일)

숙종은 민가에서도 며느리가 거짓말로 시부모를 욕되게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데 하물며 왕가라면 어떻겠느냐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 임금이 중전을 쫓아내려고 저러는 건가? 미친 거 아냐?’
그들은 중전 폐출은 안 된다고 읍소했다. 임금의 덕에 누가 될 것이니 불가하다고 했고, 만백성이 우러르는 어머니기에 내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숙종은 물러서는 법을 몰랐다. 인현왕후를 폐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삼겠다는 그의 뜻은 확고했다. 왕은 비상한 수단을 쓰기로 했다. 좋은 말로 안 된다면 공갈협박을 하는 수밖에.

때마침 지난번에 조정에서 쫓겨난 자들이 반대상소를 올렸다. 옳지, 잘 걸렸다. 숙종은 주동자들을 잡아들였다. 상소문 중 몇 대목을 트집 잡고 저의가 뭐냐며 극악한 고문을 가했다. 압슬(사기조각 위에 무릎 꿇리고 허벅지를 무거운 돌로 누르는 고문)과 낙형(불에 달군 인두로 온몸을 지지는 고문)도 모자라 또박또박 말대꾸한다며 몽둥이로 입을 치게 했다.

고문을 당한 사람들은 후유증으로 유배 길에 숨졌다. 숙종은 앞으로 중전 폐출에 반대하면 역적으로 다스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신하들도 더 이상 왕에게 토를 달지 못했다. 임금의 지엄한 공갈협박에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이다.

1689년 5월 인현왕후가 폐비되어 궁궐에서 쫓겨났다. 곧이어 장희빈을 왕비로 삼는다는 숙종의 전지가 내려졌다. 궁녀 출신 신데렐라 왕비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최고로 행복한 그 순간, 최악의 반전이 시작되고 있었으니….

본부인과 첩의 경계를 허문 장희빈의 슬픈 숙명

숙종은 1693년 ‘미녀 왕비’를 제쳐두고 궁에서 일하는 최씨 여인을 가까이 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정식궁녀가 아니라 무수리였다. 궁에는 나인 외에 또 다른 여성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나인의 하녀, 궁비(宮婢)들이었다. 이 가운데 무수리는 물 긷는 일을 했다. 처소에서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목욕하려면 물이 필요했다. 우물은 처소 바깥에 한두 개 있을 뿐이었다. 무수리들은 하루 종일 처소와 우물을 오가며 고생스럽게 일했다.

그런 무수리가 임금의 눈에 띌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야사에는 최씨가 인현왕후를 위해 치성 드리는 모습을 숙종이 우연히 보고 감동했다고 한다. 물론 뒤에 지어낸 이야기다. 사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는 알 길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그보다는 무수리와의 만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추론해보는 게 훨씬 영양가 있다.

먼저 숙종이 한 눈을 팔았다는 건 왕비에 대한 애정이 식었기 때문 아닐까. 그가 처음에 장옥정에게 반한 데는 미모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왕비도 나이가 들었다. 원자 키우랴, 내명부 관리하랴 바빠서 예전처럼 외모를 가꾸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자 임금의 애정도 시들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또 숙종이 무수리를 만난 건 왕비가 나인들을 철저히 단속했기 때문 아닐까. 왕비는 궁녀 출신답게 나인들의 욕망을 경계했을 게 틀림없다. 신데렐라는 자기 하나로 족하니까. 특히 가까이서 시중드는 ‘지밀나인’들은 엄격하게 통제하고 감시했을 것이다. 왕의 시선이 무수리에게 향한 건 그래서다. 단속망을 피해서 궁비를 넘본 거다.

숙종은 장옥정에 대한 애정이 식어갔고, 그녀의 단속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렇게 되면 본전 생각이 안 날 수가 없다. 인현왕후를 쫓아낸 일 말이다.

임금은 정치인이다. 중전 폐출에 대한 민심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이 사건을 빗댄 김만중의 한글소설 ‘사씨남정기’가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였다. 조선 사람들은 본부인을 쫓아낸 남편이라며 왕을 욕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도 이미지가 안 좋으면 소용없다. 어떻게 해야 잃은 점수를 만회할 수 있을까. 숙종은 숙종답게 나갔다.

1694년 임금은 또 다시 대대적인 정계개편에 돌입했다. 본의 아니게 인현왕후를 쫓아내는 데 일조한 신하들을 몰아내고, 그녀를 지키려다 화를 당한 자들을 조정에 불러들였다. 이른바 ‘갑술환국(甲戌換局)’! 이 또한 기사환국처럼 왕비 교체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사랑보다 정치적인 의도가 짙었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받아들여 민심을 회복하고자 했다. 중요한 것은 모양새다. 쇼를 잘 해야 한다. 임금은 손수 서찰을 써서 전처에게 띄웠다. 거의 연애편지 수준이었다.

“꿈에 만나면 그대가 내 옷을 잡고 비 오듯 눈물을 흘리니… 어찌 다시 만날 일이 없겠는가?” (‘숙종실록’ 1694년 4월 12일)
뻔뻔한 숙종은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장옥정을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별당으로 돌아온 장희빈은 분통이 터졌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처소 한켠에 신당을 차려놓고 굿에 몰두했다고 한다. 인형에 바늘을 꽂고 초상에 화살을 쏘는 저주의 굿판이었다.

얼마 후 인현왕후는 종기로 고생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는 종기가 무서운 병이었다. 중전은 아파서 거동조차 힘든 지경이 되었다. 장희빈의 처소에서 굿소리가 들린다는 귀띔을 받자 인현왕후는 저주를 의심했다. 그러나 진위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중전이 죽으면 희빈이 복위할 거라고 생각한 궁녀들이 협조를 거부한 탓이다.

장희빈은 과연 왕비 자리를 되찾을 수 있었을까? 1701년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희빈의 운명은 크게 요동쳤다. 무수리 출신의 또 다른 신데렐라, 최숙빈이 저주굿을 고변하여 원조 신데렐라를 저격한 것이다. 장희빈은 세자(훗날의 경종)를 위해 치성을 드렸을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돌아온 것은 남편이 배달 보낸 사약이었다.

“첩의 본분을 망각하고 왕비에게 방자했다.”
이것이 숙종이 장희빈에게 갖다 붙인 죄목이다. 왕실에서는 왕비가 본부인이고, 후궁은 첩이었다. 어쩌면 이 죽음은 후궁으로서 왕비에 올라 본부인과 첩의 경계를 허문 장희빈의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은 명목상 일부일처제 국가였다. 하지만 남성들은 벼슬길에 오르고 재물을 모으면 첩을 두었다. 이 성적 욕망과 혼외관계가 만연하자 그 수혜자인 조선의 지배층은 첩과 본부인의 선을 긋고 엄격히 통제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했다. 첩의 자식들인 ‘서얼(庶孼)’의 출셋길을 막은 것도 그래서다.

덕지덕지 칠해진 당쟁의 붓질을 지우고 보면 장희빈이 악녀로 몰린 이유는 단순하고 선명해진다. ‘신데렐라 왕비’의 출현은 조선의 이율배반적인 사회질서를 뒤흔드는 일이었다. 숙종을 비롯한 지배층 남성들은 그녀를 본부인과 첩을 가르는 희생양으로 삼고 이후 후궁의 왕비 책봉을 금지했다.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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