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건 언 땅 뿐"… 맨손으로 선진국 된 나라

머니투데이 이재은 기자 2018.10.01 06:40
글자크기

[이재은의 그 나라, 핀란드 그리고 차별 ①] '차별철폐와 평등' 중요 이념으로 삼아 전후 빈곤국에서 선진국으로 발전

편집자주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핀란드 Tullisaari /사진=위키커먼스핀란드 Tullisaari /사진=위키커먼스


"가진 건 언 땅 뿐"… 맨손으로 선진국 된 나라
"진짜 대단하다." 서울 을지로 근처에서 만나 함께 막걸리를 마시러 가던 길, 친구가 입을 열었다. 핀란드인인 친구는 내내 빌딩으로 가득한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어떻게 이렇게 야경이 멋지지. 진짜 대단한 나라야." 그가 한국의 발전상에 감명받아 한국으로 공부하러 온 지 딱 일주일 됐을 때였다.

그가 한국을 오기 전부터 우리의 대화 주제는 언제나 '한국과 핀란드 중 어느 나라가 더 대단한가'였다. 한국인인 나는 "교육 강국, 복지국가 핀란드가 최고다"라고 치켜세웠고, 그럴 때면 그는 "핀란드의 이미지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잘 홍보됐는지 모르겠다"며 "한국의 기술력은 세계 최고"라고 답해 훈훈한 장면을 연출하곤 했다. 물론 그 뒤에 자국에 대한 자아비판(내가 "한국의 청년 실업률이 높다" "한국의 자살률은 세계 1위다"라고 말하면 그는 "핀란드의 청년 실업률이 최고다" "핀란드의 청소년 자살률은 세계 1위다"라는 식)도 뒤따라왔지만.



내가 아무리 핀란드를 추켜세워도 그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가 전형적인 핀란드인이었기 때문이다. 핀란드인들의 무뚝뚝함과 겸손함은 널리 정평이 나있다. 2016년 JTBC '비정상회담'에서 핀란드인 레오는 "핀란드인은 무뚝뚝하다"면서 "여자친구에게도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지 않을 정도"라고 말한 바 있다. '무뚝뚝' 핀란드인들은 매우 겸손하기도 하다. 핀란드에 있다보면 '자기자랑'하는 이들은 외국인 뿐이라는 이야기가 들릴 정도로 핀란드인들은 '겸손'을 가장 큰 미덕으로 꼽는다. 생일은 여러 곳에 알려 함께 행복을 나누지만, 본인의 수상·합격·승진 등의 소식은 절대 먼저 알리지 않는 게 핀란드인이다.

하지만 이들과 더 깊이 대화해보면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나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무것도 없던 신생 독립국이 이처럼 강국으로 거듭난 데 대한 자부심 말이다. (핀란드인들은 애국심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핀란드 시장에서는 '국산'(kotimainen·꼬띠마이넨)이라 적힌 농산물이 불티난듯 팔리고, 매년 20여차례에 달하는 국기게양일에는 해당 건물의 관리 인력이 시스템적으로 청색·백색의 핀란드 국기를 게양한다.) 친구는 내가 '한강의 기적'을 이야기할 때마다, 불과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전후 빈곤국에 불과했던 핀란드의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사진=핀란드 관광청/사진=핀란드 관광청
사실 지금이야 핀란드는 명실상부 선진국이지만, 불과 100년 전 독립한 국가다. 1917년 12월6일 핀란드가 제정러시아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무려 6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핀란드는 스웨덴의 속국이었다. 즉 스웨덴의 지배 650년과 제정 러시아의 지배 110년까지 총 760년을 피지배국가로 산 셈이다. 더군다나 신생 독립국 핀란드의 영토는 3분의 1에 달하는 부분이 북극이고, 노르웨이나 덴마크처럼 천연가스나 석유 등의 자원도 없었다. 인구라도 풍족했던 한국과 달리 당시 핀란드의 인구도 370만명에 불과했다. (현재도 핀란드 인구는 550만명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2018년, 핀란드는 세계 손꼽히는 선진국이다. 레가툼 번영지수 1위, 세계경제포럼 국가경쟁력 1위, 교육경쟁력 1위, OECD 학업성취도 국제학력평가 1위, 국제투명성기구 선정 반부패지수 1위, 미국 월드리포트지 선정 미국이 가장 배워야 할 나라 1위… 1950년대까지만 해도 농업중심국가였다는 게 믿기지 않는 발전이다.

핀란드인들에게는 특유의 정신력 '시수'(sisu)가 있다. 시수는 역경과 시련을 견뎌내는 핀란드인들의 국민성으로, 척박한 땅에서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끈기를 가리킨다. '시수' 개념을 가진 핀란드인들은 '3억 달러'라는 소련핀란드전쟁(1939~1944년) 배상금을 갚기 위해 똘똘 뭉쳤다. 막대한 배상금을 갚기 위해선 경제적 발전이 뒤따라야했기 때문에, 산업화된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정부 주도의 대대적 투자프로그램이 실시됐다. 하지만 핀란드는 알고 있었다. 인력도, 자원도 부족한 핀란드가 살아남기 위해선 기술, 디자인, 창의력, 솜씨가 강조되는 제품에 주력해야한다는 것을. 그렇게 마리메꼬, 이딸라, 아르텍 등의 디자인 브랜드 제품이나 컴퓨터 제어 기계 시스템, 특수차, 휴대전화, 선박 등 기술지향적 제품들이 핀란드의 주력 수출품이 됐다.


마리메꼬 제품들 /사진=위키커먼스마리메꼬 제품들 /사진=위키커먼스
핀란드인들은 그들의 발전 이유로 '시수' 뿐만 아니라 '평등'을 꼽는다. 페카 티모넨 핀란드 독립 100주년 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은 "우리는 지난 100년간 표현의 자유, 교육, 자연 중시 가치, 그리고 평등을 통해 많은 걸 이뤄냈다"고 평가했다. 핀란드에서 '평등'은 최고의 가치로 여겨진다. 평등을 지키기 위한 정부 산하 전문기관이 있을 정도다. 차별금지 민원도우미(옴부즈맨)라는 전문 기관은 신체적 조건, 연령, 성, 종교, 이념, 언어, 피부색 등의 이유로 억울한 처우를 받거나 불이익이 있었을 경우 이를 조사하고 피해자를 지원한다.

핀란드는 인구가 작은 나라인 만큼 여성의 역할이 중요하단 걸 일찍이 인정했다. 일본의 아베 신조 정부는 저발전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여성 노동력 향상을 통한 경제 부흥(우머노믹스) 카드를 꺼내들었는데, 핀란드는 국가 발전을 위해 이 카드를 일찍이 사용해온 셈이다. 자연히 핀란드에선 여성인권을 향상하는 방향으로 꾸준비 법이 개정돼왔다. △1864년 25세 이상 독신 여성에게 법적 성년 지위 부여, 결혼법 개선 △1868년 이혼이 쉽도록 이혼법 개정 △1871년 여성에게 대학 진학 기회 부여 △1878년 여성에게도 남성과 동등한 상속권 인정 △1890년 교육기관에서 여성 교사 허용 △1906년 여성 참정권 허용 △1907년 최초 여성 국회의원 선출(200개 중 19석) △1916년 여성이 대학교수 될 자격 허용 △1922년 미혼모와 그 자녀의 권리를 공식적 규정 △1970년 낙태 허용 사유에 사회적 적응 사유 포함 △1986년 자식에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 중 선택할 수 있는 권리 부여 등이다.

타르야 할로넨 전 핀란드 대통령 /사진=위키커먼스타르야 할로넨 전 핀란드 대통령 /사진=위키커먼스
변화는 이어졌다. △1990년 세계 최초 여성 국방부장관 취임 △1994년 여성에게 자원 입대 기회 부여 △1995년 지방자치단체 선출직, 지방행정부 및 정부위원회에 여성 비율 40% 할당 명시… 이 같은 노력으로 핀란드에서는 2000년 여성 대통령 타르야 할로넨이 당선됐고, 2005년 재선됐다. 2003년 세계 최초로 남녀동수내각을 구성한 것도 핀란드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17 세계 성격차 보고서'(Global Gender Gap Report 2017)에 따르면 핀란드는 세계 3위(성 격차 지수 0.823)로, 1위 아이슬랜드(0.878), 2위 노르웨이(0.830) 등 북유럽 이웃 국가들과 함께 최상위권이다. 한국은 성격차 지수 0.650으로 조사대상인 144개국중 118위에 머물렀다. 핀란드의 여성 노동 시장 참가율(72%)은 남성(76.2%)과 비슷하다.

이에 대해 나이지리아 저널리스트 오노메 아마와(Onome Amawhe)는 나이지리아 일간지 '뱅가드'에 "핀란드에서 평등은 국가가 발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평등 중에서도 특히 양성평등이 그러했는데, 이를 통해 전체 인구의 절반에 달하는 여성의 노동력이라는 잠재력이 모두 사용됐다"면서 "양성 평등은 사회, 경제 그리고 민주주의 발전에 모두 기여했다"고 밝혔다.

핀란드인들이 현재 자국을 바라보는 감정은 한국인들이 한국을 바라보는 감정과 유사한 것 같다. 여러 외세에 억압당했던 국가가 선진국으로 발전한 모습을 바라볼 때의 그 벅찬 감정 말이다. 1899년 작곡된 이후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핀란드인들에게 '애국심의 표상'으로 사랑받는 장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Finlandia, op.26)에는 그 감정이 압축돼 담겨있다. 핀란디아는 시벨리우스가 1899년 제정 러시아에 억압된 고국을 바라보면서 작곡한 곡이다. 느릿하게 시작한 노래는 점차 고조돼 의지와 투쟁의 자세를 독려하다가, 평화로운 핀란드의 찬가로 장엄하게 마무리된다.

'차별 없는' 국가로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핀란드. 다음 편에서는 '차별 없는' 국가에서도 나타나는 차별을 짚어보고, 우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해본다.

참고문헌
핀란드, 가지, 데보라 스왈로우
북유럽의 외로운 늑대 핀란드, 언어과학, 정도상
핀란드의 마음, 책과 나무, 방민수
북유럽 스타일 100, 페이퍼스토리, 배리 포셔
핀란드 들여다보기, 매일경제신문사, 이병문

☞[이재은의 그 나라, 핀란드 그리고 차별 ②] 계속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