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알게 돼 죄송합니다" 역사 속 숨은 독립운동가들

머니투데이 황희정 기자 2018.08.15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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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는 역사' 통해 본 광복을 위해 노력한 9인…기록되지 않은 독립지사 많아

왼쪽부터 강우규, 김혁, 김규흥. /사진=문화재청 범재기념사업회<br>
왼쪽부터 강우규, 김혁, 김규흥. /사진=문화재청 범재기념사업회


광복절을 맞이하기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일제에 맞섰다. 김구, 안중근, 안창호, 유관순 등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 옆엔 이름을 가리고 묵묵히 지원한 조력자들도 적지 않았다. 73년간 광복절이 반복됐지만, 기록되지 않아 기억에서 사라진 이들을 복원하는 일도 광복절의 참된 의미일지 모른다.

독립유공자유족회 홍보국장으로 활동한 윤종훈이 최근 펴낸 '이름없는 역사'는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찾아낸 독립운동가 9인의 이야기를 담았다. 낯선 이름 뒤에 숨겨진 진하고 강렬한 이들의 발자취를 추적했다.



①조선총독부 총독에게 폭탄 투척, 강우규

강우규 의사는 1855년 평안북도 출신으로 대한제국의 교육자이자 한의사이며 독립운동가다.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에서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해 폭탄을 던졌으나 결국 거사에 실패했다. 남대문역은 지금의 서울역이다. 옛 서울역사 앞 광장에는 강 의사 동상이 있다.



②만주 무장투쟁의 선봉에 서다, 김혁

김혁 장군의 본명은 김학소며 1875년 10월 경기 용인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서 근대식 군사교육을 받았다. 3.1운동이 발발하자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뒤 중국 만주로 망명했다. 먼저 서간도에서 흥업단 부단장으로 활약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에 본격 나섰다. 북간도로 옮겨 임시정부를 지지하던 북로군정서에서 활동하면서 청산리대첩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③항일무장투쟁의 선구자, 김규흥


범재 김규흥 선생은 1872년 충북 옥천읍에서 태어났다. 임시정부의 파견원으로 김규식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박용만과 함께 중국 베이징에서 흥화실업은행을 세워 무장투쟁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 작고할 때까지 의열투쟁, 언론사 설립, 둔전제 실행 등 독립운동의 획을 긋는 주요한 투쟁의 배후 역할을 했다.

왼쪽부터 차리석, 박차정, 윤경빈. /사진=책 '이름 없는 역사'·광복회·문화재청왼쪽부터 차리석, 박차정, 윤경빈. /사진=책 '이름 없는 역사'·광복회·문화재청
④임시정부의 버팀목, 차리석



차리석 선생은 1881년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출생했다.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에 교사로 부임, 학생의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했다. 안창호와 양기탁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해 독립운동 방법 등을 배웠다. 이후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중앙감찰위원장을 역임하며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유해가 안치됐다.

⑤열혈 의열단원, 박차정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 선생은 1910년 부산 동래 출신이다. 그의 부친은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무단정치에 비분강개해 자결했다. 어머니 역시 강한 사상적인 배경을 갖고 있어 선생 역시 식민지 현실을 올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졌다. 근우회의 핵심간부 역할을 맡으면서 광주항일학생운동에 이어 서울 여학생시위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김원봉 선생과 결혼한 후에는 남편과 함께 의열단의 핵심단원으로 활약했다.



⑥마지막 광복군, 윤경빈

윤경빈 선생은 1919년 평안남도 중화 출신이다.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해 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 군사교육훈련을 받고 제1기생으로 졸업했다. 이후 광복군 총사령부에 소속돼 활동했다. 임시정부 경위대의 대장이 되면서 백범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과 청사의 경호를 담당했다.

왼쪽부터 양승만, 채규호, 하상세. /사진=책 '이름 없는 역사'·국립대전현충원왼쪽부터 양승만, 채규호, 하상세. /사진=책 '이름 없는 역사'·국립대전현충원
⑦양평의 천석꾼에서 독립운동가로, 양건석·양승만 부자



일제에 대항해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양건석 선생은 직접 만든 태극기 100여 장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이후 선생은 주모자 색출을 벌이는 일본 순사를 피해 땅을 헐값에 처분한 뒤 중국 지린성으로 떠났다. 신흥무관학교에서 하사관 과정을 수료한 뒤에는 청산리전투에 참여했다. 대한독립군을 조직한 양승만 선생은 그의 아들이다. 양승만 선생은 항일 투쟁의식을 고취할 교육활동에 매진했으며 비밀공작을 통해 항일투쟁운동을 전개했다. 양승만 선생의 딸 양옥모 여사는 중국에서의 삶을 접고 아버지의 나라로 와 여의치 않은 형편에도 봉사활동에 힘쓰고 있다.

⑧광주학생운동을 이끌다, 채규호

채규호는 1909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났다. 광주고등보통학교 5학년 재학 중 전남 나주역에서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들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한 것이 발단이 돼 한·일 중학생 간에 충돌이 거듭되자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교섭에 앞장섰다. 그러나 해결의 실마리는 찾지 못했다. 1차 궐기 시 거리투쟁 때 행동대를 지휘하다가 체포됐다.



⑨교육이 보국이다, 하상세

1918년 경남 창녕 출신인 하상세는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민족사상이 깊어졌다. 일본의 군수공장 원산철도공장에 노력동원을 나간 것을 계기로 공장을 폭파하려다가 일본헌병대에 붙잡혔다. 폭력행위 등으로 징역형을 받고 원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열악한 교육현실을 마주한 뒤 교육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사람들과 함께 곡괭이, 삽, 호미로 돌산을 깎아 운동장을 만들 만큼 교육에 대한 열의가 강했다.

◇이름없는 역사=윤종훈 지음. 이상 펴냄. 208쪽/1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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