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삭 임산부, 버스서 휘청…'양보'는 없었다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 2018.08.10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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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버스 임산부석 20곳 살펴보니, 비워둔 곳 1곳(5%) 불과…"명당이라 앉는다" 배려 실종

7일 오후 서울 한 시내버스 안에 만삭 임산부가 서 있다./사진=남형도 기자7일 오후 서울 한 시내버스 안에 만삭 임산부가 서 있다./사진=남형도 기자


7일 오후 5시50분쯤 서울 한 시내버스. 퇴근길이라 좌석은 이미 꽉 차 있었다. 잠시 뒤 정류장에 버스가 멈췄다. 몸이 무거워 보이는 한 여성 승객이 탔다. 출산이 임박한 듯한 '만삭'의 임산부였다. 한손엔 짐까지 들고 있었다. 그는 맨 앞쪽 좌석 앞에 안전바를 잡고 섰다.

교통 체증에 버스는 여러 차례 멈췄다 가길 반복했다. 임산부 몸이 이를 따라 휘청거렸다. 홑몸이 아닌터라 흔들림은 더 컸다.



하지만 임산부 앞쪽에 앉은 승객은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주변 승객들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버텨야 할 시간은 길지 않은 듯했다. 두세 정거장이 지난 뒤 임산부는 버스에서 내렸다.

서울 시내버스 '임산부 배려석'(이하 임산부석)이 무색하다. 핑크색으로 눈에 띄게 해놓아도 '배려 실종'이다. 의무가 아닌 탓에 뭐라 할 수도 없다. 그저 성숙한 시민 의식에 기댈 뿐이다. 하지만 그러는 새 임산부들은 버스서 고통을 겪고 있다. 때때로 만원버스에 난폭 운전까지 겹칠 땐 그야말로 속수무책, 울고 싶은 심경이다.



9일 서울시버스운송사업조합에 따르면 시내버스 전체 좌석 수는 차종마다 다르지만 통상 24~25석(대형차 기준)이다. 이중 분홍색으로 표시된 임산부석은 한 좌석, 노약자 배려석이 4~5좌석이다. 서울 시내버스는 총 7405대이므로 임산부석은 7405석, 노약자석은 2만9620~3만7025석 남짓이다.

가뜩이나 적은 임산부석인데, 그마저도 배려를 찾긴 힘들었다. 머니투데이가 7~9일 서울 시내버스 20대를 살펴본 결과 전체 20석 중 임산부를 위해 비워둔 경우는 1건(5%)에 불과했다. 이 또한 배려를 위해 비워뒀다기보다, 당초 버스가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왜 그럴까. 해당 버스 승객들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갖가지 항변이 쏟아졌다.


'별 생각 없이 그냥 앉았다'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임산부석에 대한 인지도, 배려 의식 자체도 높지 않은 것. 주부 손나정씨(37)는 "임산부석인 건 알고 있었는데, 자리가 있길래 그냥 앉았다"고 했다. 직장인 박모씨(41)는 "다리 아프니까 앉지, 별 이유가 있겠느냐"며 "임산부석인 줄도 몰랐다"고 날을 세웠다.

임산부석이 '명당'이라 앉았다는 응답도 다수였다. 실제 임산부석은 버스 앞쪽에서 2~3번째 좌석에 위치한 경우가 많다. 버스 흔들림이 덜 하고, 하차시 문과도 가깝기 때문이다. 취재 결과 버스 앞뒤 자리가 있음에도, 임산부석과 노약자석이 먼저 차는 경우가 많았다. 대학생 윤형기씨(21)는 "만원버스라 사람이 많아지면 내리기가 힘들어 이쪽 자리에 앉는 걸 선호한다"고 말했다. 배려가 외려 '독'이 된 경우다.

같은 대중교통과 비교해도 지하철보다 버스가 더 심해 보였다. 같은 기간과 시간, 서울 지하철 2·5·9호선 내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 20석을 파악해보니 6석(30%)은 비워져 있었다. 좌석은 물론 벽, 바닥까지 핑크색으로 디자인한 덕분인지 승객들 인식이 더 높았다. 특히 자리가 비워져 있을 때 일부 승객을 제외하곤 앉지 않으려는 기류가 흘렀다.

양보 없이 버티는 임산부들은 괴롭다. 속도 안 좋고 어지러운 와중에 1시간 넘게 버티는 경우도 있다. 힘든 몸에도 택시비 아끼려 참는터라 서럽기까지 하다는 하소연이 나온다.
/사진=머니투데이db/사진=머니투데이db
5개월차 임산부인 직장인 오모씨(36)는 올해 어렵게 임신을 했다. 올 여름 폭염을 버티느라 무거운 몸이 천신만고였다. 그렇다고 출·퇴근할 때 택시만 타기엔 돈이 아까워 버스를 탄다. 회사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 남짓. 하지만 양보를 받은 건 손에 꼽을 정도다. 손잡이를 잡고 악착 같이 버티느라 손에 굳은살까지 배겼다. 그런데도 양보는커녕 배를 밀치고 가는 승객도 있었다.

오씨는 "임산부석은 기대도 안하고, 가끔 다른 자리가 나도 밀치고 앉기 바쁘다"며 "앞에 서 있어도 모른 척하거나,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많다. 속상하다"고 토로했다.

배부른 티도 안 나는 초기 임산부들은 유산 위험이 더 높지만, 배려를 받기 더 힘들다. 핑크색 임산부 배지를 달아보지만 못 알아보는 시민들이 많다.

이 같은 상황이라 가뭄에 콩나듯 배려를 받을 땐 고마운 마음이 크다. 7개월차 임산부인 이현정씨(33)는 "초기라 많이 힘들었을 때 버스를 타고 가는데, 한 군인 청년이 멀리서 달려와 좌석에 앉으라고 양보해줘서 눈물이 핑 돌았다"며 "배려가 의무는 아니지만 몸이 많이 힘들다. 시민 의식이 더 좋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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